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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Feed-book!

황석영 삼포 가는 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4. 15.

살다 보면 엄한 사람한테 속 얘기할 때도 있는거야. 엄한 사람은 비밀을 담아둘 필요가 없잖아.”

 

얼마전 개봉한 영화 <우아한 거짓말> 중에 나온 대사랍니다. 저는 이 영화 못봤는데, 영화관 영수증 밑에 이달의 명대사라면서 적혀있더라구요. 엄한 사람한테 속 얘기한 적이 없어서 엄청 공감가진 않아서 보고 넘겼는데, 오늘 이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삼포가는 길>을 읽구요.


ⓒRobert Roth

<삼포가는 길>은 십년만에 고향인 삼포로 가는 정씨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영달, 그리고 국밥집에서 도망쳐 집으로 돌아가는 백화 이 세명의 낯선 사람들이 함께 나눈 하루를 담은 여로 소설이에요황석영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향이라는 소재를 아름다우면서도 가슴 한구석을 먹먹하게 잘 표현한한편의 수채화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세 엄한 사람은 서로의 속 얘기를 입 밖으로 상세히 꺼내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 깊이 연대감을 느끼고 서로에게 애틋한 기분을 느낍니다. 아마 길 위에서 만난 떠돌이들이 하루를 함께 보내고 음식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속 얘기를 한 것만큼의 관계를 나누지 않았을까요.

길은 참 애매한 공간입니다. ‘목적지로 향하는 중간지점’. 누구에게는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곳이겠지요. 하지만 세 사람에게는 길이 곧 집이고 삶입니다. 특히 영달에게는요. 영달은 평생을 떠돌아 사는 뜨내기인생의 남자입니다. 소설의 첫문장도 이렇게 시작하죠.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그는 길 위에서 궁리하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길이 꽃길도 포장도로도 아니지만, 그 길이 새벽의 찬바람이 부는 거친 자갈길이라도요. 영달의 여유 있는 마음이 조금 부럽기도 해요. 전 못그러거든요. 방향감각을 살리려고 잠깐 서 있는 게 완전히 멈춘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일단 움직이지 않으면 뒤쳐질 것같다는 성과주의적인 생각은 왜 사라지지 않는것일까요.

 

정 씨는 고향인 삼포로 십년만에 가는 길입니다.

 

"사람이 많이 사나요, 삼포라는 데는?"

"한 열 집 살까? 정말 아름다운 섬이요. 비옥한 땅은 남아돌아 가구,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 있구 말이지."

 

객지에서 아득바득 살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에게 삼포는 하나의 이데아적 세계로 기억되고 있었던가 봅니다. 현실이 고달플수록 과거는 더 아름답게 기억되니까요. 하지만 그런 기대도 잠시, 소설의 마지막에 역에서 만난 노인에게서 절망스러운 소식을 듣게되죠.

 

동네는 그대루 있을까요?”

그대루가 뭐요. 맨 천지에 공사판 사람들에다 장까지 들어섰는걸.”

그럼 나룻배두 없어졌겠네요.”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 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에게 고향은 이미 공간의 일점을 차지하는 구체적인 지명으로서의 성격을 벗어난 곳입니다.

 

술집작부였던 백화는 누구보다 질풍노도의 삶을 산 여자에요. 처음 만났을 땐, "나 이름이 백화지만, 가명이에요. 본명은...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아."라고 말했지만 그날 밤 헤어지면서 비상금을 털어 빵과 계란을 쥐어주는 영달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내 이름은 백화가 아니에요. 본명은요... 이점례예요."라고 말하는 백화의 말을 읽고는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해졌어요.

 

ⓒToni Demuro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기에 하루만에 헤어지는 게 당연한 건데도 어쩜 이렇게 먹먹해질까요. 마치 10년은 살비비고 산 부부가 생이별을 하는 것처럼요.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건 시간의 문제와는 별개인거 같아요.


ⓒFrancois Henri Galland


이 소설이 낭만적이고 서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길 위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라는 장소는 얼마나 애매하고 불완전한 곳인지. 낯선 세사람이 그렇게 쉽게 마음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건 길이라는 특색있는 장소에서의 만남이었기 때문이겠죠. 불안하기때문에 더 절실했던 타인의 온기,손길,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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