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너는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 <사슴>
이 작품들, 한 번쯤 보신 적 있으시죠. 사슴같이 긴 목, 동공없는 눈, 둥글고 쳐진 어깨. 워낙 특색있는 초상화라 한번 보고 잘 잊혀지기 힘든 그림들일겁니다. 이 초상화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라는 이탈리아출신의 화가의 작품인데요, 모딜리아니는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긴 열정적인 화가였어요. 저는 오늘 도리스 크리스토프가 쓴 모딜리아니 작품책을 봤습니다.(출판사-마로니에 북스)
모딜리아니. 이름도 참- 예술가스럽죠?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이 예명이 아니라 본명이라네요. 모딜리아니는 1884년에 태어나 1920년에 결핵으로 세상을 뜬 화가입니다. 그가 한창 활동할 때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큰 바람을 몰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한 개성있고 매력있는 화가였지만 당시 미술계에서는 인상주의 때문에 늘 주변인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죠. 그는 인상주의가 추구하는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행로를 걷는 다는 걸 작품 몇 개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책에는 모딜리아니가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르누아르의 멋진 저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가 크게 실망하고 틀어졌다는 일화도 소개하네요.
르누아르, <두 자매>
르누아르는 젊은 후배인 모딜리아니에게 여자와 사랑을 나눌 때와 똑같은 쾌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여인의 엉덩이를 몇 시간이고 애무한다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 모딜리아니는 노화가의 이 말에 여자 엉덩이에는 관심이 없노라고 응수하고 그대로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어렵다지만ㅎㅎㅎ 어쨌든 회화에 대한 인상주의자들의 개념과 모딜리아니의 개념은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흔히 인상주의는 감상적이고 촉각으로 느껴지는 듯한 회화를 선호했죠. 순간을 포착하려고 늘 노력했구요. 모딜리아니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보다 정신적이고 서정적이며 동시에 훨씬 차가운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했어요.
언젠가 그가 적어두었던 메모들이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내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현실도 아니다. 나는 무의식, 즉 인간의 본능이라는 신비를 알고 싶다” 라고 적혀 있는. 그러니까 모딜리아니는 20세기 초반의 큰 센세이션이었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니체를 아는, 그것을 작품으로 구성하고자 한 예술인이였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의도를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우리는 모딜리아니 초상화에서 ‘눈’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인물들은 시선이 있지. 비록 내가 동공을 그려 넣지는 않았어도 내 인물들은 세상을 볼 수 있다네.”
그는 무의식과 인간의 본능을 표현하기 위해 눈을 뜨지도, 그렇다고 감지도 않은 상태로 그렸고, 그건 모딜리아니 추상화만의 특징이 되죠.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흔히 말하는 눈은 그의 그림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뜨지도, 감지도 않은 눈은 모델의 시선이 내면세계와 외면세계 양쪽으로 열려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듯해요. 또 몽환적인 분위기에도 톡톡한 기여를 하구요. 말없이 내면을 향해 있는 비개인화된 얼굴에서는 개인주의를 초월한 표현을 위해 모든 주관성이 배제되어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이런 보편성, 아니면 익명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객관성을 지향했고, 대상을 양식화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통해 초상화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자신 나름대로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설정한 다음, 그것에 맞추어 실제 초상화모델의 외양을 표현했던 것이죠. 모델의 심리상태나 성격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고, 단지 조화롭고 아름다운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만의 양식을 확립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만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사유하게 된 것은, 한 때 조각에 열정을 쏟아 부었던 때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가면과 고대 조각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스타일의 조각상들을 만들었어요. “고대인을 현대인으로 만들고 싶은” 모딜리아니의 노력에서 그만의 독특하고 차분한, 우아하고 때로는 우수에 젖은 듯한 그런 그림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모딜리아니식’의 이 초상화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겠죠-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 - 모딜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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