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물리적인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의지에 반하도록 우리에게 해가 가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폭력들 또한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시정은 인식에서 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폭력의 정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1. 판단의 홍수
우리는 끊임없이 매스미디어의 영향 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디어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어떠한 형태의 편견을 주입한다. 뉴스도, 심지어 무해하게 느껴지는 드라마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편견과 정보를 주입합니다. 모든 편견이 나쁜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은 일관성있는 형태로 우리에게 과도한 양의 편견과 판단 기준이 주입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우리의 성 역할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우리가 어떠한 사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할지조차 모두 정해져버리고 있습니다.
혹시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은 없으신가요? 뉴스같은 것을 찾아본 뒤 어떤 감정이나 반응을 보여야할지 몰라서 다른 사람들의 댓글을 통해 확인한 적 말이지요. 이제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조차 허락을 받아야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목소리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더한 문제는 이러한 것이 오히려 정당한 것처럼 느껴지고 내재화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면 애도하는 행동을 보여야합니다. 남들이 욕하는 대상을 같이 욕해야합니다. 그 이면에 왜?라던가 이유를 묻는 질문은 부족하고, 쓸데없는 음모론은 넘칩니다.
남들이 비판하면 나도 비판하고, 남들이 침묵하면 나도 침묵하게 되는 사회입니다. 인간은 분명 사회적인 동물이지만, 오늘날은 과도하게 남의 눈치를 보는 듯합니다. 우리가 조금씩 제 목소리를 내야하는데도요.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권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해야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 나는 정말 내 생각의 주인인가? "
오늘날의 우리는, 평범한 드라마의 한 장면도, 평범한 음악의 한 소절도 스스로의 판단을 가지고 보아야합니다.
2. 정신적 폭력: 혐오
오늘날 대중이 원하는 것,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제외해버리고 나면 '혐오'가 됩니다. 이러한 혐오는 신조어의 조성을 통해 또한 일어나는데,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이렇게 형성된 언어가 퍼져나가 대중성을 갖게 되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의 감정이 보급되는 것도 이와 맥락을 함께하여 보편적인 감정이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언어는 이미지와 함께 합니다. 이전에 '개똥녀'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매우 오래전의 일입니다만, '~녀' 라는 호칭은 그때부터 유행처럼 퍼져나갔고, 지금 이 시대에 존재하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나 차별은 어째 이전의 제도적 차별에서 부터 빠져나온듯 해보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역할에 맞추어 해야할 행동을 규정지어 그에 벗어나는 행동은 혐오의 눈길로 쳐다보는 눈초리가 있는 사회에서는 아직도 평등이라는 것이 내재화되기엔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어의 혐오라는 것은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를 통해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한동안 특정 지역의 사람들에 대한 비하가 유행처럼 퍼져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 지역 사람은 속을 알 수 없다, 겉으로는 친절한데 나중에는 뒷통수를 친다'는 식의 편견이 퍼져있었지요.
그 때 무서웠던 것은 나 또한 그러한 생각을 답습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경험적으로도 내가 아는 사람들의 행동이 그렇게 느껴지고, 특정지역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가로 생각했지만, 지역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보면 다들 비슷비슷하게 잘못을 하고, 나는 단지 그러한 말뜻을 가진 프레임이 있기에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친절하게 행동해도, 이면에는 어떤 다른 진심을 품고 있을 것이라 의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어쩌다가 무심한 태도를 보였을때 이것이 진심이다 라고 기억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웃긴 것은 출신 지역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 때는 별다르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편견은 강자를 상대로 보급되지 않습니다. 지역적으로도, 생물적인 성별로도 인터넷 상에서 대중들에게서 '혐오'의 시선을 받는 것은 사회적인 강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딘가는 이러한 우리의 혐오의 감정조차 권력의 힘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3. 성적 폭력
연애 관계에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거나, 어떠한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관계라던지 말입니다. 그리고 기대되는 성적인 역할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보아야합니다. 특히 이는 육체적인 관계에서 이 불평등은 가시적입니다
정신적인 사랑만으로는 절름발이라고 말하듯이 중요한 요소이지만 많은 경우 성적인 관계에 있어서 정말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인지, 상대방이 원해서 하는 것인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사랑한다는 이름 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랑받기 위해서 혹은 상대방의 욕망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기에 실제로는 성관계에 아무 느낌이 없거나 원하지 않는데도 하지만 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안할 권리가 있는 것이 당연한것인데, 생명을 가질 수도 있고 잘못된다면 그 자체로 커다란 트라우마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인데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한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이었던 것은 후회가 남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을 욕망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디어는 여성의 모습을 성적인 욕구에 있어 직접 원하지 않는다. 늘 구애하고 자신의 성적인 매력을 과시하는 역할만을 줄 뿐입니다. 이는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은 성관계를 원하는 여성상을 만들어냅니다. 원할 때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되고, 원치 않을 때도 상대방의 욕구에만 따르게 되는 관계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영화 님포매니악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 세상에 섹스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범죄는 없지만, 사랑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범죄는 수 없이 많다."
폭력은 뻔한 형태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다른 숭고한 가치의 얼굴을 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늘 깨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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