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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Feed-book!

은희경 새의 선물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6. 2.

지난주는 정신없이 바쁜 한주를 보내다가 결국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몸이 이기지 못하고 급성편도염에 걸렸었습니다.

꼼짝없이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침대에 누워있다보니 무료하기도 하고, 성격상 '뭐라도 해야할것같은' 의무감에 스마트폰으로 전자북도서관을 뒤져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을 읽었습니다. 

누워서 읽는 불편한 포즈인데다가 스마트폰의 자극적인 조명까지 합세해 제 독서환경을 방해했지만 그럼에도 내용이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400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소설 한권을 맛있게 먹었습니다.ㅎㅎㅎ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라는 프롤로그로 시작하는 <새의 선물>은 삼십대 중반의 여성이 자신의 열두살 시절을 회상하는 액자형식의 장편소설입니다. 전쟁의 충격으로 어린 딸자식을 기둥에 묶어두고 자살한 어머니, 이후 도망간 아버지를 둔 '진희'(나)는 일찍이 자신의 삶의 시작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삶의 숨겨진 비밀을 다 알아버린, 남의 속내를 예리하게 간파해내는 조숙한 아이인 '나' 가 바라보는 세상은 시니컬합니다. 


ⓒEylul Aslan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내 내면속에 있는 또다른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보게 하는 것은 이십 년도 훨씬 더 된 습관이다그러므로 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만 지탱돼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









아주 어려서부터 '바라보는 나'를 숨긴 채 '보여지는 나'에 집중했던 아이의 냉소적인 시선을 보면서 약간의 쓸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는 아이의 주장이자, 작가가 말하려는 핵심적인 이 메세지 속에서 소설의 제목 <새의 선물>의 의미를 떠올렸습니다. 

<새의 선물>은 삶의 선물, '삶이 나에게 주는 기회' 를 표현한 제목일 것입니다. 책 속에서 인상깊었던 구절이 있었습니다.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그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 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살인을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배신자가 되는 것 역시 배신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므로, 그 기회를 받아들이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지만 선택의 전 단계에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느냐는 순전히 삶이 하는 일이다. 배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배신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짓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어린 진희의 삶이 그에게 준 기회는 너무나 비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인해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기에,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으며, 이는 자신의 삶이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삶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삶에 대한 신랄함과 거리유지의 감각으로 삶에 열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과관계로 본다면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는 명제는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닙니다.   

이런 아이의 시선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사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삶이 나에게 어떠한 기회를 주었건, 그것을 선택하는 주체는 본질이 아닌 실존이 되는 것이죠. 독재정권 60년대에 10대를 보내고, 그 회상의 시간을 지나 격동의 90년대에 30대를 보내는 이 여인의 실존주의는 삶에 대한 강한 주체적인식을 가볍게, 그리고 유쾌하게 그려냈습니다. 또한 당시의 자신의 주어진 삶에 대해 너무나도 당연히 체념해버리는 사람들(특히 여성)에 대해 비판적 시선도 잊지 않습니다. 진희(나)의 동네에는 '광진테라 양복점' 부부가 사는데요. 남편 박광진은 낮에는 여자놀음에 밤에는 아내에게 손지검을 밥먹듯하는 패륜남입니다. 착해빠진 아내는 그 수모를 다 겪고 늘 도망치고 싶어하지만 남편과 어린아들의 곁을 떠나지못하구요. 처녀 시절, 지금의 남편에게 순결을 바쳤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모든 인생을 묶여사는 구시대적 여인상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광진테라 아줌마를 보며 어린 진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줌마가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의 삶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어떤 사람이든간에 양복점 뒷방에서 강제로 순결을 잃은 순간 이미 자기의 삶은 결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아저씨가 자기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달라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줌마는 그런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줌마들은 자기의 삶을 너무 빨리 결론짓는다. 자갈투성이 밭에 들어와서도 발길을 돌려 나갈 줄을 모른다. 바로 옆에 기름진 땅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한번 발을 들여놨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뼈 빠지게 그 밭만을 개간한다.


ⓒMariam Sitchinava

이토록 우뚝 선 당당한 한 아이, 아니 한 인간의 이런 모습에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쓸쓸함과 외로움은 있었습니다. 언제나 '보여지는 나'로 살기를 너무나도 빨리 결정한 사람은 누구도 위로해줄수 없는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영역이 있을 테죠. 가령 짝사랑하는 오빠의 편지를 받고도 " 누구의 삶에서든 기쁨과 슬픔은 거의 같은 양으로 채워지는 것이므로 이처럼 기쁜 일이 있다는 것은 이만큼의 슬픈 일이 있다는 뜻임을 상기하자.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속에서 살아가러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라며 마음껏 편지를 가슴에 껴안고 즐거워하거나 되풀이해 읽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빨리 고독을 알아버린 어린 아이의 그것에 연민을 느낄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전에 심심풀이로 코스모폴리탄 잡지를 보다가 요새 인기에디터인 곽정은이 쓴 피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자들이 남자를 고르는 조건 중 '모나지 않은 가정환경'을 꼽는 것을 화두로 던지며 이어간 재미난 글이었는데요. 

"어떤 집안에서 어떻게 자라난 남자든, 나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으되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남자라면 좋겠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으되 나쁜 환경에서 태어났다해도 낙담하지 않는 남자라면 더 좋을 것 같다. 삶의 말랑함을 먼저 배우는 것은 그저 때 이른 축복이지만 삶의 고단함을 애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일생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Roger Duvoisin

어린 진희(나)에게도 이 심심한 위로의 말을 던져주고 싶습니다. 너무빨리 알아버린 인생의 짐이 버겁더라도, 네 태생의 고뇌야말로 성숙의 자양이 될 것이고, 아무나 얻을 수 없는 삶의 통찰과 그로 인한 삶의 기쁨, '새의 선물'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숲속에 마른 열매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무 밑에 있던 여우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호랑이가 그 여우를 보았다. 괴보 여우가 저렇게 다급하게 뛸 때는 분명 굉장한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도 뛰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뛰는 모습을 숲속 동물들이 보았다. 산중호걸인 호랑이가 저렇게 도망을 칠 정도면 굉장한 천재지변이거나 외계인의 출현이다. 그래서 숲속의 모든 동물이 다 뛰었다. 온 숲이 뒤집혀졌고 숲은 그 숲이 생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히 삶을 이끌어 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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