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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Feed-book!

한강 채식주의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5. 31.

ⓒSarolta Ban

환상은 가시적 세계인 현실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불가시적인 세계의 언표이며, 태생적으로 현실과의 상호대립성을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어원상 눈에 보이게 하다’, ‘보여주다에서 유래한 환상적(fantastic)’이라는 용어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현실인 듯이 눈앞에 드러내 보이게 하기 때문이죠. 모두가 당연하게 인정하고 의구심을 품지 않는 세계를 전복함으로써 의심의 기회를 제공하는 환상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호성과 불확실성 때문에 억압당하지만, 또한 그 억압의 주체인 거대담론을 무너뜨리는 가능성으로서도 존재합니다.

 오늘 그 가능성을 <채식주의자>에서 보았습니다. <채식주의자>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으로 이루어진 한강 작가의 연작소설입니다. 죽어가는 개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영혜는 어느날 끔찍한 꿈을 꾸고 난 후 점점 육식을 멀리하고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간다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이런 주인공을 중심으로 첫번째 <채식주의자>에서는 아내 영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남편, 두번째 <몽고반점>에서는 처제의 엉덩이에 남은 몽고반점을 탐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사진작가인 영혜의 형부, 세번째 <나무 불꽃>에서는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을 목격했으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언니 인혜가 각각 3편의 화자로 등장하죠.

 

ⓒElina Brotherus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간 순간 봤어. 수백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내리고 있었어. ()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에 젖었어. () 아직 내 옷에 피가 묻어 있었어. 아무도 날 보지 못한 사이 나무 뒤에 웅크려 숨었어.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그 후 세상의 모든 규율을 거부한 영혜는 그녀를 둘러싸는 속박의 현실을 온몸으로 부정합니다. 규범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영혜의 행동은 광기에 젖은 것이며 교정받아야 마땅한 것이죠. 안정적인 질서로 돌아가려는 세상은 그것을 무너뜨리는 는 그녀를 일종의 방해자로 취급합니다. 내몰리게 된 영혜가 다다른 곳은 그녀 자신만의 환상적 공간’. 현상계 너머의 아득한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내밀한 세계로의 초대장이었습니다. 

환상은 전복을 의미합니다. 이 연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데, 대개 신화에서 시작하여 전설, 민담 등 다양한 민중의 계보로 그 맥을 이어 오는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문학의 이 환상성은 근대소설이 등장하면서, 근대소설이 지향하는 사실성의 힘에 밀려 현실 이면으로 억압되었습니다. 때문에 환상을 표현한다는 건 친숙함과 편안함의 세계인 리얼리즘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힘을 간직하게 됩니다. 친밀한 현상계를 낯섦과 불안함으로 바꾸어버리는 역할을 바로 환상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Toni Demuro

영혜가 가지는 식물적 환상(나무가 되어간다는 환상)은 타인이 보기에 기괴하며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녀에게 있어 환상은 그녀 자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녀의 환상은 고정된 주변세계를 두드리는 힘이 되며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는 현실에 최초의 의문을 제기하는 역할을 합니다. 영혜는 상징계의 틀을 벗어나고 억압의 시선과 통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모색합니다. 이 공간은 자신이 나무가 되는 공간으로, 육식의 세계에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생명의 공간입니다. 비록 그 공간이 현실의 영혜의 육체를 갉아 먹을지라도 그녀의 영혼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어주기에 그녀는 환상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죠. 존재의 고통을 온 몸으로 느낄 때, 영채는 변신하고자 합니다. 더운 피가 끓는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부드러운 나무껍질로 뒤덮이고 싶어 합니다. 부정적인 현실을 탈주하려는 간절한 욕망은 규칙의 세계를 지양하고 이를 초월하려는 꿈의 최종단계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Marcel Christ


이즈음처럼 무수한 색채들이 그의 안에서 터져나온 적은 없었다. 마치 몸의 내부가 힘찬 색채들로 가득 차올라, 그 격렬함이 더 견디지 못해 분출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 매우 격렬하게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영혜의 식물 되기욕망은 그리스 신화의 다프네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다프네는 많은 남성들의 구혼을 받았지만 모두 마다하고 숲속을 돌아다니며 사냥하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그녀에게 결혼, 부부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때문에 그녀는 구혼자 중의 하나인 태양의 신 아폴로의 손길도 거부하죠. 끈질긴 아폴로의 구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다프네는 아버지에게 나무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영원히 처녀로 남는 것을 택합니다

이 다프네 신화는 한강의 소설에 나오는 식물 되기의 원형이 되는듯 해요. 남성 중심적인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몸짓으로 나무로 변하기로 주체적인 결정을 내리는 여성은 본래 억압의 객체로 침묵하는 존재였으나 변신을 통해 생명의 주체로 탈바꿈합니다. 그 희망의 여정이 환상으로의 발걸음인 것입니다.

 

주체와 객체’, ‘남성과 여성을 가로지르는 끈질긴 장막을 찢어내는 욕망은 본래의 자아 정체성을 거부하고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를 꿈꾸는 근거가 됩니다. 욕망하는 이는 욕망에 의한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혜가 거식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포기한 것처럼 욕망자는 새로운 변화와 생성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주어진 경계선 안에 자신을 묶었던 끈을 끊고 벗어나서 달리는 것입니다.

 욕망에 의한 상처를 깊게 바라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고통을 응시하고 그 균열을 견디고 더 나아가 그 상처에 익숙해지는 것이 영혜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때문에 소설은 이렇다 할 결말을 맺지 않습니다. 이는 상처에 익숙해지도록 독자를 이끌지만 이 상처는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다는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죠. 익숙해진다는 것 또한 안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영혜의 언니 인혜는 영혜에게 ……어쩌면 꿈인지 몰라.” 라고 속삭입니다. 삶은 곧 환상이며 그 무상함을 인식하는 것으로 고통을 극복하려는 마음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Egon Schiele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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