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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Feed-book!

토마스 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5. 30.

너로 인해, 내가 일찍이 알지 못했던 것을 나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다. 그것의 대부분은 생생하고 환한 것이었다. 내 몸 안에도 얼마나 생생한 더운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를 알았고, 네가 일깨워준 감각의 예민한 촉수들이야말로 내가 썼던 수많은 시편들보다도 훨씬 더 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렀던 것들이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다는 것을, 시의 감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  


파격적인 베드신으로 대중사이에서 큰 이슈를 불러왔던 영화 '은교'의 원작소설, 박범신 작가의 <은교>중 한 구절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은교>와 꽤많이 오버래핑되는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입니다.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고상한 인생을 살면서 적잖은 상과 그와 비례되는 명성을 쌓아왔던 작가 '구스타프 아센바흐'가 중년을 넘어 노년의 문턱에 다가서면서 찾아온 슬럼프를 극복하고자 휴양지 베니스의 리도섬으로 떠나면서 일어나는 일을 담은 소설입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필요했다. 여름을 그럭저럭 견뎌 내고 생산적으로 만들려면 즉흥적인 삶, 빈둥거리는 생활, 먼 곳의 공기, 새로운 피의 수혈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여행을 떠나는 거다ㅡ 그는 이런 생각에 만족했다. 아주 멀리 가지는 않더라도, 호랑이가 사는 곳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침대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매력적인 남쪽의 어느 세계적인 휴가지에서 서너 주 동안 낮잠을 즐기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그리스 조각처럼 완벽한 미모를 가진 '타치오'라는 소년을 보게 되죠. 아센바흐는 순식간에 소년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매료됩니다. 쉰 살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춘기 소녀처럼 들뜬 마음으로 타치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습니다. 평생을 절제와 금욕 속에서 살아왔던 아센바흐가 베니스에서 만난 소년을 보고 본능과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 겁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다 그렇듯이 아센바흐는 타치오에게 호감을 얻기 원했지만 그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쓰라린 불안감을 느낍니다. 하얗게 새어버린 흰머리, 자글자글하고 생기없는 본인의 얼굴과 자신을 매혹시킨 어여쁜 소년과 마주할때면 구역질이 날만큼 절망스러웠던 겁니다. 그가 타치오에게서 느낀 아름다움은 그 싱그러운 젊음에서 온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미 지나쳐버린 청춘에 대한 회한이 타치오라는 미소년에게 투영된 것일테죠- 

그러던 중 아센바흐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챕니다. 도시 곳곳에서는 이상한 소독약 냄새가 나고, 전염병이 나돌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죠수소문을 해도 "관광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시당국이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소독을 실시한다"는 얘기뿐이었지만 아시아 어딘가에서 시작된 콜레라가 유럽 전역에, 그리고 리도 섬에까지 상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말을 전해 준 사람은 아센바흐에게 하루빨리 섬을 떠나라고 충고하지만 그는 섬을 떠나지도 않을뿐더러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람들이 전염병을 피해 모두 섬을 떠나고 타치오와 자기 둘만 섬에 남는다는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을 하죠.  곧 타치오의 가족이 섬을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된 아센바흐는 안타까운 눈길로 타치오의 행방을 좇다가 결국 그와의 이별에 절망한 채 정신의 죽음과 동시에 육체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세상 사람들은 존경해 마지않는 그 작가가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마무리되는 이 소설은 앞서 말했듯이 <은교>와 너무 닮아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많이 생각이 났어요. '아름다움'이라는 강력한 끌림, '잃어버린 젊음'에 대한 서글픔은 인간이라면 어쩔수없이 지고가야할 본능같은 것이겠죠.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심연의 본성을 소설로, 시로, 음악으로 살려내는 예술가의 필사적인 시도 덕분에 우리는 그 본성의 욕망을 보다 아름다운 눈과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소설 중에서도 이런 구절이 나오거든요.

 

중요한 지적 생산물이 지체 없이 광범위하고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작가 개인의 운명과 동시대인의 보편적인 운명 사이에 은밀한 유사성 내지는 합일점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어떤 예술작품에 명예를 안겨 주는지 알지 못한다. 전문가적 안목이 없는 그들은 그 작품에서 수백 개의 장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그토록 크게 공감한 이유를 정당화 한다. 하지만 이들이 찬사를 보내는 실제 이유는 무언가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그 작품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어린 미소년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미쳐가는 한 노작가의 슬픈 이야기를 보고 감동하는 건 무언가 헤아릴수없이 그에게 공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끌림이 '본능'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움을 보고 경탄할수있는 인간이야말로 보다 인간적인 삶을 영유할수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보는 책과 음악, 각종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들은 이런 아름다움을 좇는 인간의 본능에서 나온 것일 테니까요. 동시에 이런 것들로 우리의 일상과 삶은 보다 풍요로워지는 것이구요.


ⓒJavier Pérez

이 소설 역시 영화로, 또 음악으로 연관되어 우리에게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아름다움의 결과물을 안겨주었습니다. 비슷한 제목 <베니스의 죽음>으로 1971년 영화화 되었는데, 여기서 아센바흐는 소설가가 아닌 작곡가로 등장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토마스 만이 이 소설을 쓸 때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를 모티브 삼은 것이거든요. (주인공 이름이 '구트타프 아센바흐'인 것도 이때문이구요.) 영화 중간중간 말러의 음악이 깔리고 특히 주제곡은 말러교향곡 5번 中 4악장입니다. 



우리 작가들이 현명할 수도 없고 품위 있을 수도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겠느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나쁜 길에 빠질 수밖에 없고, 어쩔 수 없이 부도덕해지고 감정의 모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쓰는 대가다운 문체는 거짓이고 어리석은 짓거리며, 우리의 명성과 명예로운 신분은 익살극이지. 대중이 우리를 신뢰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고, 예술을 가지고 대중과 젊은이를 교육하겠다는 생각은 해서는 안 될 대담한 발상이야. 태어날 때부터 개선의 여지가 없는, 천성적으로 타락의 심연에 빠져드는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교육자의 자질이 있다고 하겠느냐? 

예술가에게 교육자의 자질은 없다지만,  누구나 느끼지만 아무나 표현할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신의 기력을 소진시키면서 작품으로 결실을 맺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미 충분한 경외심이 듭니다. 아센바가 타지오를 만나 그에 관한 작품을 씀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름다움만이 신적인 동시에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실로 감각적인 것의 길인 셈이지. 어린 파이드로스여, 예술가의 길이란 정신에 이르는 길이야. 그런데, 얘야, 감각을 통과해 정신적인 것에 이르는 길을 걷는 자가 언젠가는 진리와 진정으로 남성다운 품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우리도 우리 나름으로 영웅이고 행실 바른 전사(戰士)일 수 있긴 하지만, 우리에겐 여자 같은 면이 있어. 열정이 우리를 고양시켜 주고, 우리의 그리움은 사랑에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그것이 우리의 즐거움인 동시에 치욕인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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