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는 사소함도 수고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있죠. 제가 요즘 그래요ㅠㅠ 해야 할 일이 버겁게 밀려서 책 읽을 시간의 여유가 없다고 핑계를 대봤지만, 지금 좀 솔직해지자면 시간의 여유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24시간도 36시간처럼, 48시간처럼 다룰 수 있을 텐데요. 그래도 좋은 영화 한편 보고 일상의 피드백을 또 한번 받았답니당.
오늘 책 한권 대신 소개해드릴 영화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her>입니다. 아직 극장에서 상영중이라 볼 계획이 있으신 분은 지금 말고 영화 보시고 나중에 읽어주세요 :) 스포일러가 다분해요.
주인공 ‘테오도르’는 손편지 대필작가. 영화는 좁은 사무공간에서 ‘남’의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 테오도르의 모습을 클로즈업하면서 시작됩니다. 정작 자신은 6년의 결혼생활을 중단하고 아내와 별거중이지만요.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같은 아내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었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듯, 그의 아내도 변하는 것을 테오도르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아내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그때의 모습 그대로 아내가 있어주길 강요했던 것입니다.
타인과의 소통이 거의 없이 따분하고 공허한 일상을 보내던 테오도르는 어느날 인공지능운영체제 OS1을 구입합니다. 복잡한 자신의 일상을 정리해줄 똑똑하고 지능적인 비서 하나를 둘 셈으로요. 그렇게 테오도르는 인공체제 ‘사만다’와 처음 만나게 됩니다.
(실제로 현실화되기 머지않아보이지만) 이 인공체제 사만나는 약간 섬뜻하리만큼 ‘인간적’입니다. 인간처럼 나날이 진화해간다는 사만나는 테오도르의 말을 듣고 반응하고, 행동하고, 또 느낍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웃고 기뻐하고 부끄러워하고 슬퍼하기도 하죠. 마치 하나의 뚝 떨어진 섬처럼 외로운 일상을 살고 있던 테오도르는 점점 이 인공지능체제의 목소리에 매력을 느끼고 급기야 사랑하게 됩니다. 사만나 역시 테오도르를 사랑하게 되구요.
두 사람(?)이 이어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목소리에만 의지해서 사랑을 나누는 모습들을 볼때는 너무 황홀해서 눈물이 날것같았습니다. 어떤 드라마에서도, 또 내 일상속 어디에서도 볼수없었던,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완벽한, 사랑의 완전한 형태를 이 영화는 너무나도 멋지고 세련되게 그려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루하루 변하고, 인공지능체제도 하루하루 진화되어가는 걸 테오도르는 또한번 인정하지 못합니다. “당신에게 귀기울여주고, 이해해주고, 알아줄 존재” OS ‘사만다’는 진화되어 ‘당신에게’ 가 아닌 ‘당신에게도’ 귀기울여주는 체제가 되었습니다. 테오도르를 사랑함과 동시에 몇천명과 대화를 나누고 641명과 동시에 사랑을 하게된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나는 당신의 것임과 동시에 당신의 것이 아니야”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테오도르는 말도 안되게 지능적으로 공개 바람을 피는 연인과 헤어짐으로서 자신의 사랑법에 대해 비로소 고찰하게 되죠. 그는 늘 자신의 연인을 ‘she’(주체)가 아닌‘her’(객체)로 보아왔던 겁니다. 영화 중간에 전부인인 ‘캐서린’이 테오도르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늘 나를 자기 생각하는 대로 하길 바라더니, 결국 컴퓨터와 사랑에 빠졌구나”
결국 이 영화는 테오도르와 사만나의 ‘종’을 초월한 사랑을 말하는 것도 아닌, 과학문명의 폐해를 말하는 것도 아닌 성숙한 사랑의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객체가 아닌 주체로 보는 순간 사랑은 성숙해지고 완전해집니다. 내가 알던 그사람, 내가 바라는 그사람은 그사람의 실제모습이 아닌데 우리는 늘 그걸 원하고 원망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한 8개월째 연애중인 남자친구와 봤습니다. 사실 영화보기 바로 전날 삐꺽했었습니다. 조금 부끄럽지만 살짝 얘기하자면, 그 친구가 저에 대한 마음이 조금은 식은 것 같다고 말해서 절 아주 슬프게 했었거든요. 그럼 잠깐 시간을 갖자고 했는데, 금세 하루 지나고 다음날 다시 돌아와서는 연애 초반의 설렘이 사라진 게 마음이 식은 걸로 착각했었다고 그러더라구요. “사랑은 빨간 색인 줄만 알았는데, 초록색일수도 있고 하늘색일수도 있고 보라색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며 동요같은 말로 절 미소짓게 했습니다. ㅎㅎㅎ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합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조금 달라지는 것일뿐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 성숙한 사람은 그 본질을 볼 수 있는 사람일 겁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편지대필작가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대필이 아닌 자신의 편지를 씁니다. 전아내 캐서린에게요. 언제나 내가 알던 아내로, 내가 바라는 아내로 살아주길 바랬던 자신의 지난 모습을 시인하면서 “네가 무얼 하건, 어디에 있건 널 영원히 사랑해”라며 다소 상투적이지만 감동적일 수밖에 없는 말을 합니다. 테오도르에게 집중된 클로즈업으로 시작한 영화는 넉넉히 줌아웃된 장면으로 끝납니다. 테오도르가 사만나를 통해 이기적인 관계법을 버리고 보다 완전한 사랑을 꿈꾸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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