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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Feed-book!

강신주의 감정수업 - 48가지 소설과 48가지 감정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4. 4.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짐을 느꼈습니다ㅡ 잘 안 쓰던 근육을 갑자기 움직였을 때 느끼는 그것이랄까요. 

기쁨 아니면 슬픔, 좋음 아니면 나쁨으로 간편하게 단정 지어졌던 제 일상에 48가지의 감정은 너무 다양했고 그것이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숨어있었던, 혹은 느껴왔지만 글이나 말로써 표현하지 못했던 내 감정을 거울처럼 비추어주는 작가의 통찰력에 저는 이 ‘판도라의 상자’를 쉽게 닫을 수 없었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의 감정은 흑백사진처럼 간단명료해졌지만 이는 풍요로운 삶이라고 할 수 없어요. 보다 다양한 색으로 감정을 물들이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고, 미술작품을 보고, 연애를 하고, 여행을 갑니다. 일정량의 수면을 취하고, 섹스를 하고, 먹고 마시며 영양을 보충하는 것만으로 인간의 삶을 구성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감동적인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예쁜 것을 보면 감탄하며 셔터를 누릅니다. 사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인간만큼 감성적인 동물도 없는 것이.


작가 강신주는 이렇게 다양한 감정들을 잊지 말고 기억해주길 당부하며 48가지 소설과 함께 48가지 감정을 소개합니다.ㅡ그 감정의 정의는 스피노자의 언어를 풀어서 제시했구요. 읽지 않은 소설은 꼭 한번 읽고 싶어지게 하는 재미있는 서평이었어요.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모든 감정이 '사랑'으로 결론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겁니다. 무신자로 알려진 강신주가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기독교적 교리를 받들었을 리는 없고, 사랑 중에서도 특히 남녀 간의 사랑으로 귀속되는 듯한 느낌은, 이 책이 인문학서인지 연애지침서인지 혼란스럽더군요. 

책을 읽으면서 최대한 남녀 간의 감정 뿐 아니라 인간 보편의 감정으로 해석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인상 깊었던 구절과 함께, 생각나는 책과 영화들을 정리해보려고합니당.ㅎㅎ


◎ 비루함-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할 노예의식 (with『무무』, 이반 투르게네프)

유년시절에 만들어진 슬픔이 하나의 습관처럼 내면화될 때, 우리는 자신을 항상 비하하는 감정, 즉 비루함에 젖어들게 된다. 습관화된 슬픔, 혹은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슬픔, 그것이 비루함이라는 감정의 실체다. 31



벨라스케스, [시녀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책 추천은 조심스러워한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이 책은 제가 지인들에게 4번이나 선물했을 만큼 자신있게 추천하는 책이에요.

 여주인공은 얼굴이 무척 못난 소녀입니다. 착하고 여린 성격의 소녀지만 못생긴 얼굴때문에 어려서부터 쌓여온 '비루함'은 그녀를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나도 그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남자는 여자를 보며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려요. 뒤늦게 인기배우가 되어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조강지처인 어머니역시, 평생을 비루함 속에 살아온 인물이기 때문이에요. 여자의 내면적 상처와 어머니의 그것은 너무나도 닮아서 남자는 여자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을 느낍니다. 남자와 여자는 곧 서로 사랑하지만 어디서도 예쁨받아 본적이 없는 여자는 자신의 '습관화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남자를 떠나게 됩니다. 








◎ 경탄- 사랑이라는 감정의 바로미터 (with『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미국낭만주의화가 비어스타트의 풍경화




경탄은 '숭고'로 바꿔 부를 수도 있다고 강신주는 말합니다. 범상함을 초월하는 비범함을 느낄 때 우리는 숭고함을 느끼고 또 경탄합니다. 높은 산의 정상에서, 또는 인간의 한계를 의심케하는 여러 압도적인 상황 같은 데서요. 범상함을 초월한다는 것은 즉, 달리 말해 '낯설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창의적 사고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낯설게 보는데서 출발한다"고 흔히들 말하죠. 이것에 대해 하이데거는 '존재의 시간' 에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까이 '손 안에 있는' 존재자를 '배려함'에서 사용불가능한 것으로. [다시 말해] 특정한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만나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작업 도구는 파손된 것으로 판명괴고 재료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도구는 여기에서도 어쨌거나 손안에 있기는 하다. (...) 이런 사용 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마침내 우리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손 안에 있지않은' 예외적인 경우, 즉 낯섦이 찾아오는 그 순간에서야 '눈에 띔'이 일어나고 여기서 우리의 사고가 시작됩니다. 

강신주는 애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도 이러한 낯섦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상대방에 의해 더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자신에 대해 별다른 생각과 긴장감을 가지지 못할 것이고, 이는 사랑의 지속성을 방해한다고 말하죠. 그렇지만 그의 말 대로라면 사랑과 안락함은 양립불가능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는 않을텐데 말이죠-  




◎ 박애- 공동체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 (with『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내 삶이 가장 비참해질 때, 인생이 바닥까지 떨어질 때, 그만큼 모든 사람을 품어 줄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좌절하지 말고 그 바닥을 차고 올라오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박애의 감수성을 배우게 되니까 말이다. 123

이 부분에서 장자크 루소의 '에밀' 중 한 부분이 떠올랐어요.

"어째서 왕들은 자기 백성들을 동정하지 않는가? 자신이 백성이 될 거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도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그토록 냉정할까? 자기 역시 가난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귀족들은 민중을 그토록 경멸하는 것일까? 귀족은 결코 평민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젊은이를 인류애, 즉 '박애'로 인도하게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화려한 운명에 감탄하게 할 것이 아니라 그 운명의 비극적인 측면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박애의 조건과 맥락을 같이하는것같아요.




◎ 탐식 - 자신의 동물성을 발견할 때 (with『먹는 일에 대한 이야기 둘』, 모옌)

스피노자는 탐식에 대해 '먹는 것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나 사랑'이라고 정의했어요. 왜 감정이라는 추상적 영역을 이야기하던 중 '먹는다'는 행위동사가 등장하는 것일까요. 음식에 대한 집착은 일반적으로 '탐욕'과 연결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악독한 부자는 꼭 배불뚝이로 그려지는 것처럼. 

또,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의 부모님이 명계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돼지로 변하는 모습이 탐욕스러운 인간을 상징하는 것도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논리에 따라 치히로는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일을 해야합니다.



영화 <센과치히로의 행방불명>中




◎ 끌림 - 사랑을 꽃필 수 없어 아련하기만 한 두근거림 (with『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끌림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나의 본질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음식이 배가 고파서 맛있는 것과 입맛에 맞아서 맛있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끌림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삶이 사랑에 허기질 정도로 불행한 상태는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한다. 408

이 부분을 읽으니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다가 처량한 마음이 들어 적어놓았던 한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누군가의 팔인 것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나의 온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온기인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 나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이 되었다.




 희망 - 불확실해서 더 절절한 기다림 (with『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희망은 분명 기쁨의 감정이에요. 하지만 스피노자는 기쁨이라는 명사 앞에 '불확실한' 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임으로서 희망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경고합니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 불확실한 기쁨이 초래할 수 있는 불행함을 잘 보여줍니다.

효과를 발생시키는 데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미국이 평등한 사회라는 사실이다. 출생과 재산상의 특권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어떤 직업이건 선택할 수 있으며, 그리고 어떤 직종에서건 자신의 능력만으로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면, 사람은 쉽게 그리고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존재한다는 인식과 함께 자신이 비천한 운명을 타고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실제적인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모든 시민이 이런 고상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평등성 때문에 그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평등의 조건은 시민들의 능력을 모든 면에서 제한하고 반면에, 욕망의 한계는 넓혀 놓는다. 시민들은 무기력해질 뿐만 아니라, 인생의 매 단계에서 애초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장애와 부딪치게 된다. 미국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장애가 되는 일부 시민들의 특권은 없애버렸을지 모르지만, 무한경쟁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장벽을 없애는 대신 그 모양만 바꾸어 놓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 비슷하고, 모두가 같은 길을 걸어간다면, 어떤 개인이건 자신을 빼곡하게 둘러싸고서 밀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헤치고 빨리 나아가기 힘들다. 조건의 평등이 형성하는 사람들의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키라고 평등이 제공하는 수단 사이의 이 끊임없는 충돌이 미국 시민들의 마음을 위협하고, 그리고 종래에는 지쳐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희망은 '불확실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우리를 꿈꾸게 하지만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운 순간, 무기력한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희망이 무너졌을 때 그 결과를 외부가 아닌 자신에게 돌리게 될 때에요. 그 순간 우리는 심각한 자괴감과 좌절의 늪에 빠질수밖에 없습니다.




◎ 소심함 - 작은 불행을 선택하는 비극 (with『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 사강)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를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영화 <화양연화>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대사인 동시에, 영화의 결말을 말해버리는, 또한 영화 속 남자주인공의 전체적인 성격을 한 마디로 정리하는 부분입니다. '화양연화'는 서로의 배우자가 불륜관계에 빠진 남자와 여자의 독특한 사랑을 담은 영화죠.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맞을까 고민이 될 만큼 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말입니다. 왕가위감독은 모든 것을 버릴 용기있는 자만이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처럼 짧은 순간 반짝였다가 이내 지고 말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 애틋하고 절절한 관계도 있는 법이므로. 



영화 <화양연화>中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지만 그녀는 평생 그를 가슴속에 묻은 채 아름답고 슬프게 기억할 것입니다. 


 슬픔 - 비극을 예감하는 둔탁한 무거움 (with『미국의 비극』, 시어도어 드라이저)

슬픔은 우리를 불완전하게 만드는 감정이라고 스피노자의 작가는 말합니다. 하지만 슬픔 속에서 완전해짐을 보여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솔벨로의 '오늘을 잡아라(Seize the day)'는 참 슬프고 울적해요ㅠㅠ 루저인생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토미의 서글프고 일진사나운 하루를 담은 이 소설은, 절망적인 오늘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을 잘 보여줍니다. 

소설의 백미는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탬킨 박사에게 자신의 돈을 모두 사기당한 것을 알고 나서 그를 찾아 헤매던 토미는 우연히 장례 행렬에 끼어들게 되고, 어느 교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시신 앞에 이르게 된 토미는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한 듯 울부짖기 시작하죠. 물론 토미의 눈물은 억눌려 있던 절망과 불안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출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솔 벨로는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그러한 슬픔보다 더 깊은 수준의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슬픔을 주는 현실이지만, 토미가 추구하는 바는 자아 중심적이 아닌, 보편적인 사랑, 곧 인간 공동체로서의 사랑인 거에요ㅡ 그는 심지어 지하도를 걷고 있던 중 군중들 속에서 갑자기 인류애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의 이러한 사랑은 교회 안에 안치된 낯선 시신 앞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한 것이 됩니다. 독자는 토미가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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