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는 단편이 좋더라고 했습니다. 짧은 글에서 오는 강렬한 울림 때문에요. 오늘 저는 짧은 단편을 읽으면서 뇌리에 박히는 울림을 받았습니다.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입니다.
2인칭 소설을 제대로 접한건, 제 기억으로는 이 소설이 처음인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내내 "당신은-" 으로 이어갑니다. '당신'은 임상치료사. 그가 히스테리아와 우울증을 앓는, 이혼경험이 있는 환자와 사랑을 시작하고 사랑을 끝내는 시점에서 일어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의 질병증세(?)는 오히려 애인의 입장에서는 매력으로 다가왔죠. 식탁위에 느닷없이 와인이 올라가는 날도 있었고, 아무도 시도하지 못할 의상을 입고 '당신'을 황홀감에 빠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폭력적으로 변하고 급기야 이별을 고하자 칼까지 휘두르는 여자의 폭력적인 모습까지 보게 된 '당신'는 캄보디아의 타프롬 사원의 나무를 보고 여자를 떠올립니다. 그 그악스러운 나무의 가지들이 사원전체를 뒤감은 모습을 보고 당신은 그 탐욕스러운 모습에서 역겨움을 느끼고,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이제는 제거불능의 존재가 되버린 여자와 그것을 일치시키는 것이죠. 자신은 그 나무에 갇힌 불쌍하고 힘없는 사원이 되는 것이구요.
캄보디아의 '타프롬 사원'
하지만 그런 그를 조용히 타이르는 승려의 가르침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나무가 무섭습니다.
나무가 왜 무서운가?
이곳의 나무들이 불상과 사원을 짓누르며 부수어 나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나무가 돌을 부수는가, 아니면 돌이 나무 가는 길을 막고 있는가.
세상 어디는 그렇지 않은가. 모든 사물의 틈새에는 그것을 부슬 씨앗들이 자라고 있다네. (...) 나무는 두 가지 일을 했다네. 하나는 뿌리로 불상과 사원을 부수는 일이요, 또 하나는 그 뿌리로 사원과 불상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도록 버텨주는 일이라네. 그렇게 나무와 부처가 서로 얽혀 9백년을 견뎠다네. 여기 돌은 부서지기 쉬운 사암이어서 이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흙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 사람살이가 다 그렇지 않은가.
ⓒToni Demuro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 작가는 독자를 다그치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Toni Demuro
혹 당신은 그녀의 나무는 아니었는가. 상담자라는 지위가 가진 매력을 후광효과 삼아 여자를 유혹하고 당신이 편안할 때마다 섹스파트너로 삼았던 것은 아닌가. 오히려 치료를 받았던 건 당신이 아니었는가. 여자의 히스테리아는 당신이 도망칠 좋은 구실이 되었던 건 아니었나. 당신이 내뱉은 말들은 그녀가 휘두른 과도보다 더 위험한 건 아니었을까. 과연 누가 나무이고 누가 부처인가.
'나'도 아니고 '그'도 아닌, '당신'의 영향은 생각보다 너무 컸습니다. 이 부분은 저를 무너지게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아니면 무언가로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으로 피해를 주진 않았는지, 누군가를 치료했다는 생각으로 사실은 내가 치유받았던건 아닌지. 나는 부처가 아니라 나무였던 건지. 억센 나뭇가지가 명치를 찌르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맘속으로 만들었던 많은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치부는 하나씩 가지고 있기에,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그걸 내 인생의 나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헤어짐을 고하는 옛애인을 떠올리며 차였던 그 순간에 분노하여 그를 나에게 상처를 준 나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나만 도움을 준거같고 나만 손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적도 적지않았습니다.
ⓒToni Demuro
하지만 그건 단순히 어리고 어리석은 핑계와 투정, 징징거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것같습니다. 좋은 결과는 내 탓, 나쁜 결과는 네 탓하고 싶은 어쩔수없는 어린 마음에 편하게 생각하려고, 편하게 살려고 그렇게 많은 나무들을 마음속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Toni Demuro
노희경 작가가 어느 책에서 이런말을 했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상처 받았다는 입장에서 상처 주었다는 입장으로 가는것. 상처 준 걸 알아챌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사람을 만나는 상황에서든, 주어진 일을 하는 상황에서든, 연애를 하는 상황에서든, 내가 나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나를 옭아매는 나무라 여겨지는 것들도 어쩌면 부스러지는 흙처럼 무너지는 나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동시에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꼭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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