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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행복에 관한 질문들

분노에 관하여, 세네카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3. 4.

 작은 것에 만족하고, 행복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알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결심하고 하루를 시작해도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가로막습니다. 그러면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행복하려고 마음먹은 우리를 힘들게 하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성격이 다릅니다. 심지어 태아도 자극에 대한 반응성의 정도가 각자 다르다고 합니다. 아주 아기때도 성격은 제각각이죠. 제가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지,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감정이나 충동이 들고, 우리는 그것을 해석할 뿐이라는 심리적 연구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그만둘 필요는 없습니다.

세네카(BC4~AD65)는 폭군인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폭군에게 자살을 명령받고, 육체적 고통 속에 죽게 됩니다.

 

(세네카의 죽음, 다비드)

 하지만 놀라운 것은, 세네카는 슬퍼하는 사람들을 되려 위안하며 담담하게 죽음을 맞아들입니다. 이는 세네카가 온 생애동안 말해왔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죽음입니다.
세네카는 우리에게 와닿지 않는 저 피안의 세계에 대해 마냥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삶에서 구체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장애물들: 고통, 분노, 근심과 같은 것을 대상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대처합니다.

분노

세네카는 "분노는 부정에 대하여 복수하고자 하는 것에의 욕망이다. 또는 포세이도니스가 말한 것처럼, 자기를 부정하게 가해한 것으로 여기는 상대를 벌하려는 욕망이다."라고 정의합니다. 
분노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합니다.

*적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분노가 필요하다 :
 검투사도 기술이 지키는 것이지, 분노는 무방비하게 한다. 분노는 한때 앞길을 가로막는 것을 박차고 많은 상대를 차례로 쓰러뜨려도 대개는 자기의 파멸로 끝난다.
 파비우스가 우리나라의 약체화된 세력을 회복시키기위해서는 시일을 늦추어 시간을 벌어 적을 초조하게 만들었던 것 말고 다른 방도가 있었는가? 화를 낸 자는 이런 것을 잘 모른다. 당시 위급한 상황에 있던 우리나라는 만일 파비우스가 분노가 치미는 대로 강경 일변도로 나갔다면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나라의 명운을 고려하여 이제 일부라도 무너지는 날이면 모든 것이 함께 궤멸할 수밖에 없던 국력의 현상을 참작하여, 슬픔과 복수를 차지하고, 오직 유효성과 좋은 기회만 노리기로 했다. 그는 한니발보다 먼저 분노를 이겼던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가. 좋은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는가. 가령 눈 앞에서 자기의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어머니가 강간을 당해도 말인가." 화내지 않는다. 그러나 보복할 것이다. 지킬 것이다.

그렇다면 나쁜 짓을 한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네카의 말은 자신이 한 잘못한 행동에 대해 마땅한 책임은 져야겠지만, 그러한 처벌을 내리는 주체가 감정적인 분노여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아닌 정당한 판결을 내려 누군가에게 준 고통만큼 책임을 지도록 해야하는데, 사실 우리 주변에서는 그러한 처벌이 피해자의 고통에 상응하지 못할 정도로 가벼운 경우라던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잘못한 행동에 대해 마땅한 책임을 지지 않기에 대중들이 가진 수단이 분노뿐이라 우리에게 분노가 정당함과 관련을 맺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대중의 분노는 힘을 가지기도 하니까요. (이처럼 왜 많은 사람들에게 가진 힘이 왜 자꾸 분노, 공격, 자살밖에 남지 않는 것일까요)

'검투사도 기술이 지키는 것이지, 분노는 무방비하게 한다.' 는 말에 동의합니다. 분노로 일이 해결된 적이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노의 존재에 대한 부당함을 주장하려면, 인간이 애초에 고도의 윤리적인 판단을 이성의 범위에서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은 판단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합리성과 감정은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감정이 억제된 상태에서 합리적인 판단수행이 더 떨어졌다는 연구결과는 유명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생각보다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분노는 순기능 이상의 역기능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1. 교육에서
교육에서 처벌punishment이 보상reward보다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학습심리학에 명시되어있습니다.
-처벌은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좋지 못하다는 것만을 전달한다.
-처벌은 그 행동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다른 대상에 대한 두려움도 키운다. (부모님에 대한 반감, 집에서 혼난 아이들이 집에 가기 싫어하는 것, 학교)

 감정적인 각성(두려움)은 학습이 더 효율적으로 일어나도록 하지만, 그러한 각성이 너무 크면 그 사건의 주인공은 교화가 아닌 두려움이 됩니다. 아이를 혼내는 많은 경우가 아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을 떠나 화풀이의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들합니다. 영국의 서머힐Summer Hill 학교의 일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한 어린시절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 학교는,(정말 멋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혼내지 않습니다(윗사람으로서 아이를 처벌하는 것이 아닌, 동등한 사람으로서 대합니다.) . 혼나야할 일, 잘못된 일이 있다면 아이들이 회의를 통해 재판을 합니다. 재판을 통해 공동체에 왜 그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 생각해보고, 그에 따른 적당한 책임을 지도록 합니다. 교육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단지 아이의 교육만을 생각한다기보다는 자신의 감정, 자존심 문제와 같은 것이 반영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또한 수많은 '대증적인' 처벌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고 왜 그것이 해서는 안되는 행동인가에 대해 생각할 시간보다는 단순한 두려움만을 심어줄 가능성이 많습니다. "엄마는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나한테 화풀이를 해!!!" 라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해보고 자란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2. 경제학적으로

 매몰비용이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듣고 삽니다. 이때까지 들인 비용을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내가 더 투자해야하는 것, 앞으로의 비용과 효용만을 비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지금까지 학교를 7학기쯤 다니고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있다고 생각했을때, 지금 한학기 등록금을 더 내고 한 학기를 더 다녀야하는가에 대한 판단 척도는 앞으로의 지출인 한학기 등록금과 졸업함으로서 얻는 효용을 대상으로 해야지, 이때까지 내가 다녔으니까 앞으로 지출에 비해 쓸모있지는 않겠지만 아까워서 계속 다녀야지..라는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분노는 이러한 판단을 흐리게 하지요. 지금 이 상황에서 (피해를 입었다거나)내가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앞으로의 효용에 도움이 될 것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을때, 이미 넘어진 것은 넘어진 것인데, 분노때문에 돌을 다시 차거나 돌에 화풀이를 하거나 집에 가서 동생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분명 나에게 비용대비 이득이 되는 행동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자제해야 한다. 보복해야 될 상대가 동격이든, 우월하든, 못하든 간에 말이다. 공격의 상대와 싸우는 것은 불안의 씨가 되고, 우월한 상대이면 미친 짓이며, 못한 상대라면 보기 흉하다.


*

 우리가 화를 내는 대부분의 경우는 어떤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 원인이 되는 것 같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화가 난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배차간격이 긴 버스가 건너편에서 떠나는데 신호가 바뀌지 않아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거나(제 얘기 아닙니다), 대기번호를 하나 앞두고 잘린다거나하는 경우들을 생각해봅시다.

세네카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우리도 모르게 '세상이 내 마음대로 굴러가야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버스가 저의 통근시간을 맞춰줄 이유는 없죠. 제가 대기번호 안에 들어가야한다는 법칙은 어디에도 명시된 적 없습니다.

그리고 세네카에 따르면 우리를 화나게 만드는 것들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의 존재 유형에 대해 품고 있는 위험천만한 낙천적인 견해들이다. -알랭 드 보통,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사람이 무엇인가를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당할 만한 이유가 없었던가, 예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것을 우리는 마땅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상과 기대에 반하여 일어난 일이 가장 심하게 마음을 뒤흔든다. 가정에서 매우 사소한 일에 흠을 잡는 것도, 벗의 경우라면 그냥 보아 넘기는 것조차 부정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적의 부정은 우리를 동요시키는가?" 예기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자만심이다. 우리는 자기가 적에게도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 안에 왕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자기는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전횡을 바라고 자기가 당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화를 잘 내게 하는 것은 무지가 아니면 오만, '사물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악인이 나쁜 짓을 저지른다고 한들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적이 해를 끼친다. 벗이 상처를 입힌다, 자식이 비뚤어진다, 노예가 바보짓을 한다고 해서, 무엇이 신기한다. 파비우스는 장군에게 가장 부끄러운 변명은 "생각하지 못하였다"라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부끄러운 핑계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태를 생각하고, 예기하고 있어야 된다. 좋은 성격에도 뭔가 가혹한 것이 나타날 것이다.'

 불공평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정의롭게 돌아간다고 보장된 적이 없다고요. 우리는 우리의 기대를 마땅히 그래야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정의를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운명 앞에 우리 인간의 몸은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가요? 그러한 인간에게 어떤 힘든 일이 일어나던지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말 못할 고통을 겪은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 또한 사람이기때문에 평정심을 찾기에는 힘들지요. 용서가 더 크고 위대한 것이라고 하지만, 아픔 앞에서 유지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피해자를 위해 그것이 이롭다면 좋겠죠..)
 
대학에 들어가는 최고의 길은 문 닫고 들어오는 마지막 합격자라고 하던가요? 안전하게 얻은 행운보다, 실패와 아슬아슬한 차이로 얻은 성공이 우리를 더 신나게 합니다. 생각해보면 일상 속에 많은 일이 '정말 운수 좋음'과 '정말 운수 나쁨'이 정말 한 발짝 차이인 것 같습니다. 버스가 지나가는데 신호가 바뀌어서 잡아서 탄다면 기다리다가 탄 것보다도 기분이 좋을 것이고, 한 발짝 차이로 놓치게 된다면 정말 기분이 나쁘겠죠. 이는 뒤의 버스가 그렇게 큰 시간차를 두지 않고 온다고 해도 비슷합니다. 단지 '재수가 없었다는' 느낌이 기분나쁜 일이죠. 이러한 기분 좋음은 그렇게 긴 시간을 가지 못하는데, 그 작은 차이로 인한 분노는 우리를 정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 작은 차이의 사건인데도, 우리가 느끼는 감사와 분노의 정도는 대칭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수많은 분들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세네카 효과: 무언가를 쌓아올리는 것은 힘들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

 

 분노 때문에, 그 순간에 짓밟힌 것처럼 느껴지는 자존심 때문에 순간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경우들이 많습니다. 다 마음의 부족함 때문이겠지만, 그래서 화는 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세네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군가 화를 낼 것이다. 그대는 친절로 나아가라. 상대로부터 반목은 버림을 받아, 곧 떨어진다. 상대가 없으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쌍방이 화를 내고 다투면 충돌이 일어난다. ... 되받아치면 몇 번이고 더 때릴 기회와 핑계를 주게 된다. 물러가고 싶어도 물러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분노의 감정을 미룰 것: 분노가 치미는 순간 말 수를 줄인다. 분노의 출구를 막는 것이다. 순간을 참고나면 별 것 아닌 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를 심판하기 : 나도 그러한 행동을 한 경우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기분이 들도록 한 때가 있을 것이다. 분노는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약점을 알아두기 : 어떤 자는 행동에 의한 모욕때문에 감정이 상한다. 이 사람은 가문에, 저 사람은 용모에 배려를 요구한다. 이 사람은 최고의 심미가로, 이 사람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이 사람은 오만을, 저 사람은 고집을 참지 못한다. 누구나 같은 자리를 얻어맞고 상처가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에게는 어디가 약한가, 거기를 가장 단단히 지키도록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버거운 일은 맏지 않도록 한다 :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너무 과중한 일은 피하든가, 아니면 적어도 거기에 종사하는 것은 피로하기 직전까지가 좋다. 마음을 가혹한 것과 관련이 없도록 하여 기분을 풀어 줄 학예에 맞기는 것이 좋다. 시를 읽는 것은 마음을 가볍게 하여 주고, 역사는 이야기로 마음을 매혹할 것이다.

약 2000년전의 현자가 말했다고 하기엔, 너무도 시간의 먼지를 타지 않은 말들입니다. 세네카의 책을 보다보면 매우 두꺼운 책임에도,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습니다.

말뿐으로 배워봤자 뭐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자꾸 반복하다보면 세네카의 말들과 만나보기 전과는 분명 달라진 나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도서 및 관련도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알랭 드 보통 (지금은 철학의 위안이라는 제목으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네카 인생록, 세네카
-화에 대하여, 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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