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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행복에 관한 질문들

빈곤에서 올 수 있는 불행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3. 10.

 아무리 우리가 행복하려고 발버둥쳐도, 빈곤의 상황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이때까지 말한 수많은 '넘치는 것의 불행'은 예외적인 사례들로 비춰지는 것일뿐, 우리에게 더 크게 익숙하고, 이때까지 있어왔던 것은 '빈곤에서 오는 불행'이었습니다.

 

 

빈곤이란 무엇인가?

 빈곤이란 다양한 각도에서 비춰질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육체적인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의 빈곤이 가장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러한 '육체적 생존이 불가능한 빈곤'은 이전에 비해 줄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 빈곤이란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누리는 삶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어느정도의 생활을 하는지 기준선을 정한 뒤, 이에 비해 어느정도의 소득을 가지고 있는지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관적 빈곤'은 자기 스스로 평가하는 자신의 빈곤정도이다. 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과 실제 소득을 비교함으로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빈곤 개념은 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득이나 소비량으로 측정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앵겔지수(사람들의 총 소득에서 음식비가 차지하는 비율) 또한 이용됩니다.

*빈곤을 측정하는 몇 가지 수단들*


(1) 엥겔 지수 : 아무리 줄여도 어느정도 이상 줄일 수 없는 것이 있죠. 바로 식료품비용입니다. 엥겔지수는 전체 가계 지출 대비 식료품비의 비율입니다. 이는 소득 분위 하위로 갈수록 커집니다. 이를 엥겔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식료품비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다른 부분에서의 지출의 비중이 줄어들었고, 그만큼 경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2) 지니 계수 : 지니 계수를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득 분위별로(가로축) 재산을 축적해나가는 그래프를 그립니다.(가장 높은 소득을 가진 사람까지 그리고 나면 꽉 차서 끝까지 오르게 됩니다.) 만약에 사회 구성원이 모두 같은 정도의 재산을 갖고 있다면 누적 그래프는 45도로 올라가는 균등선 그래프가 될 것입니다. (녹색- 완전 평등 상태) 만약에 극단적으로 한 사람이 모든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마지막에만 쑥 올라간 기둥이 있는 그래프가 되겠지요.(붉은색-완전 불평등 상태) 보통의 그래프는 그 중간에 속합니다. 그 그래프를 로렌츠 곡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로렌츠 곡선이 녹색선에 가까울 수록 평등하고, 붉은 선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한 것이 되겠지요?  그래서 지니계수는 녹색선과 가로 세로 축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넓이를 A라고 하고, 로렌츠 곡선과 완전 평등선과의 벌어진 틈(분홍색으로 채워진 부분)의 넓이를 B라고 했을때, B/A로 구합니다. 평등할수록 벌어진 틈이 줄어들어, 0에 가까워지겠고, 불평등할수록 1에 가까워지겠습니다.

 

 


빈곤의 질적 측면


 사람이 품위있는, 혹은 일반적인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데는 어떠한 항목들이 필요할까요?
아주 옛날에는 항목별로 몇가지씩 정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삶의 모양이 매우 다양해지면서 '일반적인' 생활에 필요한 요소들이 점점 단순한 육체적 생존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고등학생 아이를 생각해봅니다. 이 아이에게는 일단 교복이 필요하고, 교과서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참고서와 문제지도 필요합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휴대폰도 필요하고, 휴대폰도 이제는 스마트폰들을 쓰니 스마트폰 요금도 내야겠지요.(예전에 피처폰을 쓸 때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스마트폰으로 바뀌면서 요금이 너무 커진 것 같습니다...) 옷도 계절별로 한두 벌이 아닐겁니다. 겨울에 입을 외투도 패딩, 코트 등 요새 가격이 엄청나지요. 상품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으로 '부과된' 물품의 양도 자꾸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소득이 늘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좀 더 커다란 그림을 그려보자면 더욱 막막합니다. 질병으로 인한 예방 및 치료비, 주거비용, 대학 등록금 등 거대한 지출들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 외에, 사실 빈곤에서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이나 문화적, 사회적 배제입니다. 그저 돈이 없는 것이 물질적 제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 나아가 앞으로의 미래(교육)까지 좌우하고, 대물림되는 것입니다. 또한 물질적 빈곤으로 인한 가족 내 스트레스와 갈등이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 .... 하지만 소득을 기준으로 빈곤 여부를 논의하는 것은 빈곤의 정도나 특성을 손쉽게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빈곤은 결국 생활의 문제다. 이는 빈곤이 소득이라는 한 가지 차원에서 모두 설명될 수 없는 다차원적인 실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 빈곤이란 먹고 입고 자는 것은 물론 질병을 예방하고 제때 치료하며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것까지를 포함해 매우 다양한 측면에서 적절한 수준을 유지할 수 없을 때를 일컫는 말이다."
"생존의 의미는 사회나 시대에 따라 다르다. 덜 발달한 사회일수록 '육체적' 생존이 강조되는 반면, 발달한 사회일수록 '인간적' 생존이 강조된다. 이처럼 빈곤을 정의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욕구는 추상적인 개념이며,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사회나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한국의 가난, 김수현 이현주 외 1명 저 중에서


실업: 양질의 일을 할 수 없다

점점 더 기업과 경제의 성장률 대비 일자리의 창출효과는 작아지고 있습니다. 고령화로 오래 일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아지고 대학을 졸업한 졸업생들도 일자리시장으로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그에비해 양질의 일자리(정규적으로 보장되는,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는, 안전한, 수입이 충분한)는 줄어듭니다. 이렇게 최근의 현상만 보지 않더라도 일을 할 수 있으나 할 수 없는(근로 능력자) 실업 또한 늘 있어왔고, 증가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두 가지 요인이 맞물려 빚어낸 것이 '희망없는 빈곤'입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이로 인해 다치고 힘든데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 빈곤입니다.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나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이제는 교육도 부의 종속변수이자, 부 혹은 가난의 대물림 수단으로 고착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식에게 이것을 물려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더욱 더 암담해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볼까요? 누군가는 밤낮없이 일해도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누군가는 일하지 않고도 넘치게 살고있다는 말이 되겠네요.

 

 

 과연 이 사회에서 빈곤을 줄일 방법은 없는 것인가요? 플라톤은 국가와 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극심한 빈곤(extreme poverty)이나 과도한 부(excess of wealth)도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어떠한 시민도 최소한도보다 5배 이상 가지는 것을 금지하고, 많은 사람이 부자에서 빈자로 전락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파산한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떄문이다."
"평등해져야 하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인류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
 많은 철학자들이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넘치고 저기서는 부족하다면 잘못된 것이다. "


 누군가는 일로 과로사하고, 누군가는 일이 없어 굶어죽어갑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한 해결책으로 얼마전에(얼마전이 맞나요?) 대통령 후보로도 나왔던 문국현 후보의 행적이 주목됩니다. 사실 많은 학자들이 일을 분할하여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충분한 휴식과 교육을 통해 생산력을 키워 기업도 근로자도 살릴 것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일을 나눈다는 것이 많은 양보와 비용을 필요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었었죠. 그런 의미에서 유한킴벌리의 성공사례는 많은 귀감이 될 수 있겠습니다. IMF 이후 많은 기업들은 기업의 생존=구조조정=정리해고 의 수순을 밟아 나갔습니다. 이때 유한킴벌리는 근로자들을 해고하는 대신 4조 근무제를 통해 일자리를 지키고, 오히려 더 많이 고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는 근무자들을 '희생시키는' 기존의 정책에 반하는 창의적인 발상입니다.


신경림 / 가난한 사랑 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무너진 공동체


과거에는 산동네가 많았었습니다. 비슷한 경제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때만해도 이런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책들이 참 많았습니다. 대개 주인공은 산동네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간다는 내용이였죠. 이게 너무 미화된 것이라고 해도, 점점 사라져가는 산동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요? <한국의 가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뿔뿔이 흩어져 반지하, 비닐하우스 등으로 혹은 고시원, 좋지않은 단칸방에서 월세를 내며 살고 있다고요. 또 중요한 것은 흩어짐입니다. 서로 의지할 수 없고, 나만 이 도시에서 이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적인 박탈감 또한 느껴지지요. 박탈감이란 사람의 생존을 다른 면으로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부분입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빈곤층에게 복지예산을 투자하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낭비는 충분한 사람들이 제도의 허점에서 받는 세어나가는 돈들이죠. 집도 있고 충분한 사람들이 정부의 돈을 받고, 받아야할 사람들이 못 받는 경우가 낭비입니다. 빈곤층에 대한 투자는 가처분소득으로 이어져 생산을 위해 재투자될 수 있는 자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낭비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재산이 충분한 사람에게 돈을 준다면 그것은 재투자의 자원이 아니라 축적되는 재산이 될 것입니다.)


빈곤과 자살, 희망없음은 절망으로, 누군가를 삶으로부터 내모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요? 이러한 죽음은 그저 남의 일이 아니라 가진 게 많으면서도 남에게서 빼앗아 더 가지려고 했던 구조, 그 효과로 누군가는 죽음까지 이르른 살인으로 볼 수 있겠군요. 그 책임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더 나았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그다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 모두의 책임. 단순히 '이익추구'가 누군가의 생명까지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얼마전 정말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절망적인 삶으로부터 떠나고 싶은 도피도 있겠지만 너무나도 힘든 삶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이 아니면 귀조차 기울여주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니까요. 또 그들의 고통에 귀기울이기엔, 너무 화려한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도서 및 관련 도서

-한국의 가난(새로운 빈곤 오래된 과제) ,  김수현, 이현주, 손병돈
-절대 빈곤, 이시이 코타
-불평등과 빈곤, 이양호
-자살 차악의 선택, 박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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