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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행복에 관한 질문들

에피쿠로스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2. 27.

먼저 벤자민 월리스의 강의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행복의 가격에 관하여 라는 강의인데, 저널리스트로써 수 많은 값비싼 상품들이 과연 '제 값을'하는가에 대한 체험에 관해 말합니다.

http://www.ted.com/talks/benjamin_wallace_on_the_price_of_happiness.html

우리는 비싼 물건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꺼이 그에 돈을 지불합니다. 술 맛을 잘 모르더라도 왠지 비싼 술은 비싸기 때문에 더 맛있게 먹게 되는 경우들이 꽤 있지 않던가요?
위의 강의에서 벤자민 월리스는 직접 그러한 물건들을 소비해봅니다. 고베 소고기(160달러), 루왁 커피, 약 80만원짜리 청바지 등등.

 

 

사실 그러한 물품들이 아무리 엄청난 스펙(이탈리아 장인의 손으로 한땀 한땀...??  등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평범한 우리들(아닌가요?)에게는 대부분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특히, 음식과 같은 경우에는 익숙하지 않은 맛이 더 좋지 않게 느껴질 가능성도 큽니다.
그리고 심지어 후에 그것이 가짜라고 밝혀졌음에도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효엄'을 증명하지요.
가격과 우리가 느끼는 효용의 그래프는 다음의 그래프와 같지 않을까요?


어느정도 이상까지 합리적인 가격차이에 의한 상품의 차이는 우리가 느낄 수 있지만, 어느 수준 이상으로는 가격이 급격히 상승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껴지지 못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10만원짜리 청바지와 100만원짜리 청바지와 같은)

 요즘은 화장품도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지요. 가격과 상표를 보지 않고 제품을 직접 사용해보고 평가하는 것인데, 저렴한 제품이라고 해도 사용감에서는 고가의 제품에 뒤지지 않는 경우도 나오더군요. 사실 질적인 면에서 비싼 물건들이 그만한 가치와 효용을 주는지 우리는 한 번쯤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싼 물건이 우리에게 꼭 좋은 것만 제공하는지에 대해 질문한 학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사람이지요.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 BC341~BC271 ) 입니다.

사실 '에피쿠로스'하면 많은 사람이 '쾌락주의자?!'하며 놀라기도 합니다. 다음의 말을 보면 '쾌락주의'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미각의 쾌락을 빼앗고, 성적 쾌락을 빼앗고, 듣는 쾌감을 빼앗고, 또 아름다운 형태를 봄으로써 일어나는 달콤한 감정들을 빼앗아버린다면 나는 행복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말이 결코 우리가 돈을 펑펑쓰며 말초적 쾌락을 추구하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사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은 무절제나 방탕함과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세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자연스럽고 필요한 욕망(식욕), 자연스럽긴 하지만 불필요한 욕망(편안한 집),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명예욕)

"욕망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것들은 자연스럽고 또 필요하다. 또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긴 하지만 불필요하다. 그리고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도 있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않은 쾌락을 제공한다. "

 굶으면 행복감을 느끼기 힘듭니다. (저도... 배고픔의 노예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채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소박한 밥상이던 아주 값비싼 요리이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에피쿠로스가 제시한 다른 예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정한 친구
-친구들과 함께하는 소박한 식사..
 우리가 생각하던 쾌락을 유발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있지만 사실 진짜 행복하기 위한 방법은 이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에피쿠로스는 모두에게 '철학하기'를 권합니다. 불안의 대상에 대해 사색해보고, 그것의 본질을 파악하기를 권합니다. 그럼으로써 욕망이 가지는 한계를 깨닫고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러한 불안과 채찍질 없이, 우리가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 정도로만 살아간다면, 제가 컴퓨터로 이렇게 글을 쓸 일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 기술발전 같은 것은 크게 이루어지지 않고, '발전한', '첨단의' 사회는 만들어지기 힘들 것입니다. 단지 작은 마을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만 부양하는 만큼 발전하겠죠.
이러한 철학자들은 그러한 사회보다, 지금의 사회가 행복의 측면에서는 훨씬 '발전한' 사회라고 말하기 힘들다고 할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두번째로 욕망을 정적 쾌락과 동적 쾌락으로 나눕니다. 어떤 것을 성취해서 해소함으로서 쾌락의 크기가 증대되는 것을 동적 쾌락, 단지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오는 고통을 제거함으로서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정적 쾌락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욕망하지 않는 상태인 정적 쾌락을 중시했습니다.
“심신의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는 정적 쾌락인 반면, 기쁨과 환희는 운동을 포함하는 현실적인 쾌락이다. 정적 쾌락은 고통의 완전한 제거로부터 오는 고요함이며, 동적 쾌락은 쾌락을 증가시키지 않고 형태만을 바꾸는 것이다." 그 중에 마음의 흔들림이 제거된 정신적 쾌락을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하며, 몸의 고통이 제거된 육체적 쾌락을 아포니아Aponia라고 합니다.
욕망이 제거된다면 인간은 자족의 상태에 이르고 자유를 그 댓가로 얻게 됩니다.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이죠.

 많은 서적과 문헌들이 우리에게 너무 '비우고, 만족하고' 살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지금 사회의 커다란 흐름이 앞을 보고 달려가고 있으니 반대방향으로 유도하는 말들이 많이 들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반대쪽을 생각해보는 것이 아무래도 등에와 같이 우리를 계속해서 깨우는 소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언제 앞을 보고 나아가야된다는 소리를 듣고 있어? 라는 생각이 든다면, 사실 무의식에 호소하고 있는 많은 메시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으리으리한 집에서 사는 행복한 드라마 속 주인공들, 상대방이 월급을 얼마나 받는가에 대한 관심, 대기업에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지, 나의 진로는 무엇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지 등등)

다시, 작은 것으로 큰 행복을 얻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해질 무렵의 아파트 불빛을 참 좋아합니다. 그 시간이 되면 집에 불을 끄고 아파트 불빛이 하나 하나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저를 매우 행복하게 만듭니다.
저에게는 그 광경이 마치 폴란드 포즈난의 풍등축제(노츠 쿠파위) 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처럼 작지만 크고 얻기 힘든 것만큼 나에게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을 지금부터라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분명 잘 찾아보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감을 촉발시키기 위한 큰 계기를, 작고 소박한 계기로 대체하는 것이죠.

 

*참고 도서 및 관련 문헌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알랭 드 보통
-쾌락, 에피쿠로스
-욕망의 발견, 윌리엄 어빈
-http://starlings.co.kr/ucc/flight/108352012070513383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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