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대주의 구역, 나라의 구별, 세계의 산, 세계의 인종, 나라의 권리, 국민의 권리, 정부의 기초, 정부의 정치 제도, 세금 거두는 법규,납세의 의무, 세금이 쓰이는 일들, 정부에서 국채를 모집하여 사용하는 까닭, 교육하는 제도, 화폐의 근본, 경찰 제도, 정신 박약아 학교, 교도소, 도서관, 각국 대도시의 모습 ..
이는 놀랍게도 현대의 백과사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약 백년 전, 조선시대 선비에 의해 쓰여진 책에 나온 목차입니다. 이 선비의 이름은 유길준이고, 책의 제목은 <서유견문西遊見聞>입니다.
서유견문은 조선 말 미국에 사찰단인 보빙사로 파견된 선비 유길준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한 것을 토대로 쓴 글입니다. 여행기로 분류되어 있고, 많이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 단순히 문물을 열거하는 얕은 책이 아닙니다. 서유견문은 세계화 사회에 이미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현재 우리는 많은 부분 외국의 문명에 맞추어 살고 있습니다. 서구식 집, 서구식 식단, 서구식 의복.. 이러한 사실로 본다면 우리의 세계화는 사실 세계화(globalization)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서구화(westeraniza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세계화가 일어났다면, 우리는 다양한 문화권의 양식(그것이 동양권이든 서양권이든)을 우리의 삶 속에 지니고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서구 중심적인, 차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길준은 개화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개화하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지혜로써 하는 방식과 용단(勇斷)으로써 하는 방식, 그리고 위력(威力)으로써 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 중 지혜로서 하는 방법이 가장 좋고, 용단으로 하는 방법이 그 다음이며, 마지막으로 위력으로 하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현재 어쩌면 마지막 방법인 위력(威力)으로써 이루어진 개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군사적으로 위협을 받아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어쩌면 경제적인 위력에 따른 개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선호하는, 우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란 사실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인 문화권의 것입니다. 식품과 상품, 문호의 개방도 경제적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고, 문화는 이를 따라갑니다.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것을 지키고 있느냐는 문제가 되겠습니다. 우리는 개화에 어떤 태도로 임하고 있나요?
지나친 자는 아무런 분별도 없이 외국 것이라면 모두 다 좋다고 생각하고 자기나라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자라는 자는 완고한 성품으로 외국사람이면 모두 오랑캐라 하고 외국 물건이면 모두 쓸데없는 물건이라 하며 자기 자신만이 천하제일이라 여긴다.
-서유견문 중에서
개화하는 일을 주장하고 힘써서 실천하는 자는 개화의 주인이요, 개화하는 자를 부러워하며 배우기를 기뻐하고 갖기를 좋아하는 자는 개화의 빈객이며, 개화하는 자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며 마지못해 따르는 자는 개화의 노예라고 할 수밖에 없다. 주인의 지위에 있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빈객의 자리를 차지할망정 노예의 대열에 선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임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도 유길준은 명확하게 제시를 합니다.
"개화는 실명의 개화와 허명의 개화로 분별된다. 실명의 개화는 사물의 이치와 근본을 깊이 연구하고 고증하여 그 나라의 처지와 시세에 합당케 하는 경우이다. 허명의 개화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서도 남이 잘된 모습을 보면 부러워서 그러든지 두려워서 그러든지, 앞뒤를 헤아릴 지식도 없이 덮어놓고 시행하자고 주장하여, 돈은 적지 않게 쓰면서도 실용성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이다. "
우리는 혹시 외국의 것을 그저 그 형식을 가져다 쓰는 것으로 개화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물론 결과물인 형식을 가져다 쓰는 것은 간편하고 '무언가 가져왔다는' 느낌은 줄 수 있으나 실정에 맞지 않고,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증 없는 형식의 단순적용은 '허명의 개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예시는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는 전문 대학원의 적용으로 매년 왔다갔다 했던 의학전문 대학원이나 자유전공 제도, 다양한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 김치 칵테일은 그러한 극단적 예시가 될 수 있지 않은가싶습니다. '한식의 세계화'라는 명목하에 수 많은 돈을 들였지만 단순히 형식을 접합하여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한 예시가 될 수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는 다르게 외국의 기술과 우리의 것을 잘 지켜낸 실명의 개화라고 할 만한 예시는 없을까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이 한 가지 예시는 보일러라고 생각합니다. 좌식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라디에이터보다는 바닥이 따뜻한 것이 더 익숙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아파트에서는 그러한 온돌 형식을 지키기 어렵지요.
그렇기 때문에 서양의 기술을 이용해 전기를 통한 전기장판을 사용하거나 바닥을 데우는 보일러는 우리의 실정에 맞는 형태가 될 수 있지요. 이는 단순히 형식의 적용이 아닌 원리를 보존하려는 노력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일들도 마찬가지로, '허명의 개화'와 '실명의 개화'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사실을 배울 때, 그에서 형식만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이것은 허명의 개화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식을 배웠을때, 그 원리를 배우고 이를 나에게 맞추어 적용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실명의 개화'이자 배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 > 행복에 관한 질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에게 놀이란 (0) | 2014.11.05 |
---|---|
사랑에 빠지는 이유 (0) | 2014.10.30 |
꽃의 치유 효과 (0) | 2014.10.29 |
치킨에 대한 슬픈 사실들 (0) | 2014.10.27 |
진실은 언제나 하나? (0) | 2014.10.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