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용하는 수단이나 도구는 그 자체의 역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전에 한 번 수업 중에 휴대폰 문자 메시지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 몇 년만에 우리의 생활은 단순히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넘은 더욱 더 침투적인 방식의 의사소통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우리를 볼 때면, 이러한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의 '지배 하'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보게 됩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우리의 사회적 욕구와 더불어 확장되어가는 SNS의 영향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나날히 발전하는 SNS로 우리의 삶도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요?
1. 메신저
이전에 네이트 온 과 같은 컴퓨터를 통한 온라인 메신저의 시대를 기억하시나요? 네이트 온, 버디버디, MSN 등 컴퓨터 앞에 앉아야만 가능했던 메신저들을 넘어, 이제는 이동 가능한 수단인 스마트폰을 이용해 메신저 서비스를 이용하죠. 이전의 문자 메시지와는 다르게, 이러한 메신저는 인터넷 연결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의 메신저를 보내는 당 요금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연결만 되어있다면 무제한적으로 보내도 추가 요금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간편함이 있지요. 심지어 요금이 발생하는 인터넷의 연결도 와이파이wi-fi의 발전으로 언제 어디서나 내가 부담하는 요금 없이 사람들에게 메신저를 보낼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메신저의 종류는 카카오 톡이 있죠(일명 카톡). 틱톡이나 커플들끼리 사용하는 비트윈between과 같은 서비스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메신저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서비스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프로필(상태 메시지)과 같은 자기에 대한 표현, 메신저 서비스 그 자체, 그리고 친구를 관리하는 주소록 및 차단, 숨김 기능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프로필이나 상태 메시지 변경은 큰 매력이 있는 기능임에 틀림없습니다. 내가 내 지인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손가락 끝으로 간편하게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외모에 우리가 들이는 수 많은 돈, 그와 관련된 시장들을 생각해보면 새삼스럽지 않지요. 또한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고요. 메신저 상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내가 정한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진이라는 시각적 자료와 언어라는 메시지를 통해서 말이지요. 사진이야 '프사기'(프로필 사진 사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의 결정체입니다. 나 자체로는 꾸미고 변형시키는데 한계가 있고, 결국 그것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은 타인의 기억과 인지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지만 프로필 사진은 타인에게 '이 사람이 어떻게 생겼더라?'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 외부적 기억이자, 절대적인 참조 사항입니다. 타인의 인지보다도 사진 자체에 기억을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 자체를 바꾸는 것이 쉬운가요 내 사진을 바꾸는 것이 쉬운가요? 요즈음은 사진을 조작할 수 있는 수많은 어플들이 있고, 사진 그 자체가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에, 또 여러번 찍을 수 있고 그 중에 최상의 것만을 고를 수 있기 때문에 나의 힘이 미치는 영향이 커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프로필 사진은 대화 상에서 나의 상징물이 됩니다. 다른 말로는, 가상의 상징물이고, 이러한 점에서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을 떠올려볼 수도 있습니다.
시뮬라시옹
프랑스 철학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이론으로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뮬라시옹(Simulation)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을 '시뮬라크르'(Simulacra)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은 다른 아닌 가상실재, 즉 시뮐라크르의 미혹 속인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사물이 기호로 대체되고 현실의 모사나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들이 실재를 지배하고 대체하는 곳이다. 이제 재현과 실재의 관계는 역전되며 더이상 흉내낼 대상, 원본이 없어진 시뮬라크르들이 더욱 실재 같은 극실재(하이퍼리얼리티)를 생산해낸다.
더이상 원본은 없고 어느 의미에서는 원본과 모사물의 구별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뮐라시옹의 질서를 이끌고 나아가는 것은 정보와 매체의 증식이다. 온갖 정보와 메시지를 흡수하지만 그것의 의미에는 냉담한 스폰지 또는 블랙홀 같은 존재가 현대의 대중이다. 사유가 멈추고 시간이 소멸된 현대사회에서 역사의 발전은 불가능하며 인권이란 미명 아래 강요된 정보에 노출된 대중과 시뮬라시옹의 무의미한 순환이 있을 뿐이다. 이같은 사고 때문에 보드리야르는 지적 허무주의자, 정치적 보수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보드리야르가 자신의 사상 체계를 만들어 가던 1960년대는 프랑스가 본격적인 대량 소비 사회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1940년대 말의 전후 복구기와 1950년대의 경제 구조 형성기를 거친 프랑스에 호황이 시작됐고 거리, 상점, 가정에 물건들이 넘치기 시작했고, 라디오와 TV가 가정필수품으로 자리 잡아 가던 즈음이었다. 넘치는 물건, 넘치는 일자리, 넘치는 이미지 앞에서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넘치는 물건들이 우리의 삶과 어떤 의미 관계를 맺는지를 고찰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시뮬라시옹 [Simulation]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하지만 이러한 메신저의 가장 큰 요소는 무엇보다도 그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에 있습니다.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저는 이 들 중 시간적 공간적 제약의 극복, 일방향성, 배제성을 꼽습니다.
1. 시간적 즉각성, 공간적 제약의 극복
우리가 모두 떠올리고 있는 메신저의 특성에 관해 생각해봅시다. 어떤 메신저이든 매우 빠른 속도를 지향합니다. 소비자는 내가 전송하는 즉시 친구에게 도착할 수 있는 빠른 메신저를 바랍니다. 만약에 국내에 있는 (해외에 있더라도) 친구에게 메신저를 보낸다면, 특별한 서버 장애가 없는 이상 1초 이내면 도착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지하철에서도 와이파이가 되어있고, 어느 산골 산 속에 가있어도 4G가 터지는(?) 세상이다. 산 속에서 찍은 꽃이나 동물 사진도 1초 안에 멀리 있는 친구나 가족에게 찍어서 보낼 수 있는 세상이라니 만약에 100년 전에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비웃었을 것입니다. 저도 몇년전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 있다면 비싼 전화 요금을 요했을 메시지 교환도,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해외, 국내 구분없이 빠른 속도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런 빠른 속도는 단점 또한 가지게 되었는데, 모든 것이 가능해지니 연락을 하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다른 어떤 수단에도 전가할 수 없고 오롯이 나의 책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도 같은 입장에 처합니다. 연락이 언제든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기다리게 되는 것이죠. 연락을 기다려 본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고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또한 약속을 잡기는 이전보다 쉬워졌지만,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바꾸기도 쉬워졌습니다.
2. 일방향성
메신저는 면대면 의사소통(face to face)과는 달리 상대방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말하고자하는 내용과는 다른, 비언어적 의사소통 요소로 표정 몸짓 외에도 말투, 어조 등을 들었다. 하지만 메신저가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없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온갖 이모티콘과 ㅋㅋ, ㅎㅎ ㅋ의 갯수.. 등 자신의 어투나 말투 등을 나타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물론 이가 비록 개성적이고 주관적인 방식이 아닌, 이미 기존에 주어져있는 감정들의 정의 하에 주어져있는 기호들을 혼합하여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요. 또한 아직도 만약에 눈치없는 누군가가, 혹은 상대방이 메신저에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평소에도 ㅎㅎ만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ㅎㅎ은 비웃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서로의 기분과 얼굴을 파악하기 힘든 상태에서 메신저는 전달됩니다. 내가 전송을 누르는 순간 상대방은 외면하고 싶더라도 (차단하거나 피하지 않는이상) 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얼굴을 보고 하는 대화도 말을 내가 전달시켜 버린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메신저는 명백하게 상대가 언어적으로 반응하기 이전에 다음 말을 일방적으로 통보기도 쉽습니다.
또한 즉각적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상처되는 말, 순간적인 기분에 따른 말도 그냥 하게 됩니다. 원래 얼굴을 보고 상처되는 말을 하는 것보다 얼굴을 안본 상태에서 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메신저로 나쁜 말을 하고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던지요! 우리는 시시각각 우리의 기분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알리려는 욕구가 고개를 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미숙한 인간 관계를 형성할 뿐입니다. 한 기사에서 읽은 말인데, SNS를 사용하는 우리들에게 참 와닿는 말인 것 같아요
"오히려 모든 기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인간관계에 좋다"
3. 배제성
요즈음 메신저에는 일대일 대화뿐 아니라 여러명이 한 창에서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그룹창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팀을 이루어 하는 모든 일에서 이는 필수적인 요소처럼 되었습니다. 메신저를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마치 '민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한 메신저 체제 안에서는 그 메신저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변동기에는 특히 아직 이를 아직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달사항에서 배제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눈 앞에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면 당장에 눈에 보이지 않는 친구에게 조금 무심해지는 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과 관련된 정보에 귀를 기울이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자극에 탐닉하지요. 단지 새로운 자극이 우리에게 어떤 보상적 작용을 가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지만 이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SNS 메신저에 대해서 잠시동안은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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