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힐의 교육: 서머힐의 교육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은 수업에 들어오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행복한 일을 찾아서 합니다. 그렇다면 서로 피해 받는 일은 없을까요? 생활 속의 대부분의 규칙들은 학생들이 회의를 통해 스스로 찾습니다. 서머힐의 창립자 닐이 강조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도덕규칙(사실은 관습적 규칙)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수영복을 입고 수영해야한다고 규정지었나요? 어린 아이들은 인지적으로 아직 이기적(ego-centric)입니다. 이들에게 형이상학적 도덕을 강요하는 것은 납득 없는, 불필요한 규제일 뿐입니다. 아이들은 스스로의 규칙을 스스로 세우고 지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필요에 의한 질서가 있을 뿐이고 잉여의, 관습의, 불필요한 규제들은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자유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질서가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을 스스로 배웁니다. 그들은 자유의 균형, 원리를 체득합니다. 이보다 더 방종에 반하는 것이 있을까요? 동시에 그들은 자신이 행복한 일을 합니다. 결론적으로 아이들은 자유 속에서 질서를 지킬 줄 알며, 행복 또한 찾을 줄 압니다. 그곳에 없는 것은 위계질서와 억압이며, 얻는 것은 자유와 행복입니다.
닐은 아이들을 향한 억압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오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거짓말을 낳고, 거짓말을 낳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숨기기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강요된 질서가 오히려 질서를 원하는 아이들을 반사회적으로 만듭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좌절되는 것은 아이로 하여금 새로운 (자신을 억압시킨 힘에 반하는) 질서를 이끌고 싶도록 만듭니다.
억압이 없다면, 아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만든 (회의를 통해 실현될 수 있으므로) 질서를 사랑하게 됩니다. 억압은 또한 복수성과 적개심을 낳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확신 없이 한 행동이라도, 안 된다는 것은 사람을 분노하게 합니다. 또한 강한 자에 의한 좌절이 없으므로 강한 자에게서 받은 적개심을 약한 자들에게 전이(displacement)시키지 않고 두려움 없이 자신을 화나게 한 행동이 있다면 그 행동자체에 대항합니다. 약한 자에게로 분노를 전이시키는 것은 많은 경우에 범죄와, 학교폭력과 연결되는 부분이지요. 이는 우리나라 전반에 걸친(유아기 때부터, 학교 폭력, 군 내의 폭력에 이어 사회 구조적으로 이어지는 폭력) 문제입니다.
또한 성의 억압도 없습니다. 오히려 억압은 죄책감과 왜곡된 성 가치관을 키우고 왜곡된 호기심이 결국은 죄책감과 잘못된 행동을 낳게 된다는 것을 닐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으며, 이의 한계에 대해 지적한 글에서도 이러한 자유로운 성교육에 대한 지적은 이 말뿐입니다 : ‘특히 이는 동양인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김은산, “A. S. 니일 연구-그의 사상과 서머힐 학교의 교육사적 의의 : 서머힐 학교의 현황과 문제점 및 성과”, 서울: 이화 여대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76)
이 학교에서는 우리가 하는 것에 반대로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조작적 정의에 의한 행동규제입니다. 물론 그들이 세운 규칙을 어긴 사람은 재판을 받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으며, 대부분 적개심을 가질 만큼의 처벌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정말 잘못한 부분을 해결하기보다는 체벌자의 개인적인 분노가 참여되어 처벌이 거세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요?
참으로 특이했던 점은 도둑질을 하는 아이에게 상을 주는 것입니다. 의외로 이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어떤 설명도 실험을 통해 제공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은 도둑질을 대부분 그만두었습니다. 닐은, 사랑이 부족해서 얻지 못하는 대상을 훔치는 아이에게는, 처벌이 아니라 그 못 받은 사랑을 주는 것이 그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학교의 자율이 프로이드의 심리성적 발달에 나오는 over fulfilled: 과잉 충족에 의한 문제발생(각 단계마다 아이에게 발생하는 욕구: EX. 구강기-입으로 무언가를 빨거나 넣으려는 욕구 가 과잉 충족되어 일어나는 고착성 문제, 이후의 성격적인 특성으로 남겨진다.)이라는 것을 뒤집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자유가 있다면 과하게 충족되는 것은 없을 입니다. 구강기에 아이에게 부모가 넘치는 사랑과 안정감을 준다고 하여 아이가 이기적인 사람이 될까요?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과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항문기의 배변훈련을 아이가 스스로 이룰 때까지 강요나 억압 없이 기다리고 자유를 주는 것이 아이에게 방종한 성격을 남긴다는 것일까요? 긍정적인 가치의 충족은 과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형태의, 왜곡된 사랑이 문제이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개인적인 분노를 아이를 위해 참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뒤 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보다는 에릭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이 이 서머힐의 결과를 더 명확히 뒷받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아이들은 자율성, 주도성, 근면성, 자아정체감을 이루는 방향으로 자랍니다. 물론 반대가치가 소실되는 것은 아니다. 죄의식이나 의심, 열등감등은 성취하기에 더 쉬운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서머힐의 교육을 통해 자라난 아이들에 대한 사후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들은 내면적 강인함을 가지고 현실세계에 적응 또한 잘해나가고 있으며, 행복감 또한 높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행한 의사보다는 행복한 청소부를 길러내고자 한다." 많은 학생들이 졸업 이후 지적이고 창의적인 일을 맡으며, 관용(tolerance)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합니다.
니체의 가르침
이러한 서머힐의 교육을 보면서 생각난 사람은 다름이 아닌 니체입니다. 많은 반사회적 범죄자들이 니체의 뜻을 곡해하여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쓰릴 미Thrill me>에는 니체의 초인 사상을 왜곡된 방식으로 받아들여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고 믿는 주인공이 나온다.)
니체는 우리가 가진 도덕이나 죄책감의 많은 부분이 관습적,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외부적 억압이며, 우리는 힘에의 의지를 발현하여 스스로의 질서 속에서 살아야한다고 합니다. 이를 많은 범죄자들은 윤리를 거스르는 범죄를 합리화하는 이론으로 오용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그러한 인간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범죄에의 이용은 단지 방종을 자유로 합리화 한 것이지요. 자신의 힘의 의지에서 나온, 내 힘에 의한 규칙의 가장 현실적으로 잘 구현된 곳이 서머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서는 자유롭습니다. 자유나 힘에의 의지를 ‘무엇이든 허용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는 ‘모든 것을 해도 된다.’가 아닙니다. ‘내 이웃, 그리고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우리의 의지에 의한 자유’입니다.
또한 행복한 인간은 남을 해치지 않습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는데, 디오니소스적인간은 자유로운 인간이며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부족한 행복을 충족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인간은 남을 해치고자 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행복한 유년시절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 한마디가 어쩌면 나에게 또 커다란 도화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행복해야합니다. 왜 어린 아이들이 무의미한 경쟁과 일관된 시각에 많은 것을 희생당해야 하나요? 어떤 아이에 대한 심리적 분석도 아이를 한 번 안아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넘치는 사랑을 주어야합니다. 그저 이상적인 외침이라는 말 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서머힐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대안학교가 없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유명한 대안학교로 이우학교라는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이 또한 함께 소개되었는데, 웬걸 인터넷에 이 학교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이우학교 서울대‘라는 검색어였습니다. 분명 그 학생은 그저 공부가 좋아서 하다 보니 서울대를 갔고, 이는 나쁠 것이없지요. 하지만 우리들의 관심이 결국에는 그렇게 자라서 좋은 대학에 갔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교육은, 결국은 아이들은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식은 일시적이나마 강요할 수 있지만 성숙, 자신감, 믿음은 체험에서 비롯됩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공허한 규율과 아이들을 싸우게 만드나요? 공부가 하고 싶지 않은 아이들이 왜 교실에 앉아서 국영수사과를 배워야 할까요? 우리의 교육은 우울증에 걸린 판사가 아닌 행복한 농부를 키워내야 합니다.
강요가 없다면, 분명 행복한 판사도 나올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만이 그 길을 걸어갈 테니까요. 인간은 다양한데, 왜 아이들의 행복을 박탈하면서까지 줄을 세우는데 열을 올리는 것일까요? 사실 이는 사회의 효율성 측면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효율성 때문에 아이들을 기다려주지 않고 떠미는 교육이 빚어낸 범죄들, 불행들, 우울증에 걸린 사회는 고스란히 어른 세대에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청춘들에게 왜 행복하지 않냐고, 버티고 견뎌라 라는 말 대신에 이제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
많은 아이들이 이 교육의 현실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고 미래에는 무언가 있겠지라는 희망으로 키워지고 있습다. 이렇게 자라 저와 같은 나이의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닥쳐오는 자유가 두렵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지금의 행복을 유보하여 미래에는 무언가 있겠지라는 희망을 가집니다. 그렇게 또 어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행복을 돌려주어야합니다. 그들이 하고 싶은 행동을 믿어야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어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을 찾도록 해주어야합다. 미래에 유보된 목표로서의 행복이 아닌, 삶의 방식으로서의 행복을 말이지요.
*참고 문헌
-EBS 다큐프라임, “학교란 무엇인가”, “학교의 고백”, “진로교육 나는 꿈꾸고 싶다"
-A.S. 닐, “자유로운 아이들, 서머힐”, 아름드리 미디어,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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