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수많은 비윤리적인 사건들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윤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윤리라는 이름은 무언가, 우리에게 지겹고 고루한 생각들을 강요하는 과목의 이름으로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수 많은 사건들은 윤리의 부재에서 또한 비롯됩니다. 윤리라는 덕목 대신에 돈, 혹은 명예를 선택하고 생명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치부하는 가치 전도적 사회가 된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나 혹은 타인의 비극적인 사건을 목도하면 우리는 우울을 느낍니다. 우울이란 진화적으로 악영향을 미치고 우리를 괴롭히기만 하는 감정일까요? 우리의 판단에서 감정을 배제하고 나면 정의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강조했듯이, 기쁨이 보다 완벽한 경지에 이르는 통로라면, "슬픔은 덜 완벽한 경지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퇴행이다.
하지만 기쁨이 어떠한 보상이라면, 슬픔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의무와 신호의 역할을 합니다.
슬픔은 갈등의 표출이다. 그런 뜻에서 슬픔은 영혼의 깊은 곳을 낱낱이 해석하게 해주는 징후라 볼 수 있다.
인생이란 서로 밀고 달기는 무의식적 충동들 간의 게임이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 누군가를 슬프게 만들고 자신도 슬퍼진다. 슬픔을 하나의 징후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그와 같은 복잡한 사정을 벗어나는 길이다.
의식이란 슬퍼하거나 감동받을 줄 아는 감수성을 통해서 이 세상에 생겨난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과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타인들이 죽거나 고통받을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해지면서 우리는 자아와 타자를 의식하게 된다. 삶은 가슴속 언어를 순환시키면서 말하기 시작한다.
출처: 베르트랑 베르줄리, <슬픈 날들의 철학>
모두가 알다시피, 슬픔도 포함하여 건강한 감정을 갖는 것은 윤리의 근간이 됩니다. 윤리의 근간에 대해서는 이때까지도 많은 이견들이 있어왔습니다.
칸트, 마음 속의 정언명령
칸트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명령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가언명령(假言命令, hyphothetical imperative)과 정언명령(定言命令,categorical imperative)이 그것이지요. 가언명령이란 다른 원하는 바를 조건으로 삼는 명령입니다. 예를 들면 "나중에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지금 열심히 공부해라" 같은 것이지요.
이러한 가언 명령은 앞의 조건을 위해서, 이를 원해서 뒤의 명령을 수행하게 됩니다. 아이에게 '사탕을 먹고 싶다면 친구와 싸우지 말아라.'와 같이 설득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지요. 명예를 위해서, 혹은 성공이나 원만한 대인관계를 통해 이득을 보기 위해서 어떠한 의무를 수행하는 우리의 모습에 많이 닮아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특정 목적을 조건화 하는 것은 원 목적을 훼손하지 않고 단지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을까요?
새로운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것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똑같이, 침팬지에게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 실험에 따르면 침팬지에게 퀴즈를 푸는 댓가로 보상을 주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바나나와 같은 것들 말이지요. 이러한 보상이 주어진 후 부터는 침팬지는 자신이 이전에 퀴즈를 재미있어 하던 것을 잊고, 보상없는 퀴즈 자체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얼마나 다른가요? 다르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윤리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다루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칸트는 다른 종류의 명령인 정언명령을 주장하지요.
1.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2.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
가언적 명령이,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다른 사람들이 의욕하는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이라면, 정언적 명령은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그런 명령'이다.
이와같은 칸트의 윤리관은 윤리의 근거를 이성 속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감정적인 충동과 도덕의 충돌 속에 살아가고, 충동이나 도덕 둘 중 하나가 승리하게 됩니다. 도덕이 충동을 이길 경우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본성, 우리의 충동은 악하기만 한 것일까요? "인간으로서 못할 짓이다"와 같은 말을 생각해보면 우리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부터 막는 어떤 선한 충동 또한 존재할 것같습니다. 그 중 하나가 공감입니다.
공감: 타인에게 이르는 가장 선한 길
공감 능력은 인간 감정의 다채로운 영역에 대해 세밀하게 체험한 위에서 획득되는 능력일 것이다. 내 속에 억압되어 있는 분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타인의 분노에 대해서도 헤아려볼 수 없다. 내 마음의 얼룩덜룩하고 울퉁불퉁한 면들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만 타인의 그런 감정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입은 자가 치유한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은 모든 종교 지도자나 신화 속 주인공이 왜 반드시 고난과 순교의 시간을 뚫고 나가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정확한 명제일 것이다.
-김형경, <사람풍경> 중에서
하지만 윤리가 개개인의 공감이라는 능력에 의존하기에는 너무 나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과 경험을 도덕의 중요한 기반 중 하나로 보았던 흄 또한 개인의 감정이 도덕의 기반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회으로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개별의 경험 모두를 가져야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감 능력을 갖춘 인간이라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사건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상상하고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다는 주장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고통을 느낄 줄 아는 능력이 다른 사람의 고통의 막으려는 근거가 된다고 할 때, 우리 모두가 이성적인 도덕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무시할 수 없는 영역임은 분명합니다. 한 실험에 따르면 감정적인 요소가 억제되었을 때 오히려 인간은 더 비윤리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또한 인간의 충동과 감정을 모두 악한 것으로 치부한다면 우리는 감정의 많은 윤리적인 장점들을 배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기때문에 가진 강점을 사용하고, 인간답게 살기를 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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