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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Feed-book!

알베르 까뮈 이방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6. 30.


피테르클레즈- 바니타스정물화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중세의 수도승들이 만나면 나누는 인사말이었다고 합니다. 인사내용이 "네 죽음을 직시해라"라니. 좀 섬뜩한가요ㅎㅎ 하지만 그들의 이 덕담아닌 덕담에는 보다 심오한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건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한계인 사멸성을 잊지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삶 안에 이미 명백히 들어와 있는 '죽음'의 존재를 명확하게 의식하라는 것이죠. 언젠가는 죽는다는 인식은 그 삶에의 의지와 의미를 잃게 할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게 될 겁니다. 돈이 무한히 많으면 생각없이 펑펑쓰게 되듯이, 시간 역시 무한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소중함과 가치는 그만큼 사라지겠지요. 우리의 시간이 유한하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생의 의지를 다시한번 불태우고 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상의 잡다한 일들, 번잡한 일들의 성가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저에게, "메멘토 모리"의 교훈을 떠올리게 한 책은 까뮈의 <이방인>입니다. 


사장이 생활의 변화에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사람이란 결코 생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그게 그거고, 또 이곳에서의 내 생활에 조금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고 나는 대답했다.


소설 속 '나'이자 주인공인 뫼르소는 '이방인'입니다. 결혼, 출세 등 세상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무관한 그의 인생관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일면을 엿볼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는 참 조용하게 흘러갑니다. 마치 와글와글한 소란 속에서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외국인같은, 그런 '소외감'(하지만 외로움은 느껴지지 않는)이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런 그가 사람을 죽입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작렬하는 태양때문. 재판을 받게 된 뫼르소는 이전에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때 그가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심한 인물로 해석되고, 살인을 저지르고도 후회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덕적 원칙이 결여된 인물로 해석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똑똑함까지 가진 인물이라고 판단되죠. 정상참작이 불가능해진 뫼르소는 결국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눈물한방울 흘리지 않은 것은, 또 사람을 죽이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불감(不感)'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Toni Demuro


이방인(outsider)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공감의 여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방인은 공감(共感)이 아닌, 불감(不感)의 주체죠.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건 그에게 한잔의 밀크커피만큼 사소하고 시시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슬프다고 여기는 건 그에게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긍정의 대상이구요. 뫼르소에게는 죽음이 슬픈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라고 생각했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죽음을 일찍이 인식해왔던 그는 오히려 죽음의 확신으로부터 존재의 자유를 얻는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 역시 그가 사형선고를 받고 난 후에 알게된 것이죠. 하루하루 심심하게 살던 뫼르소는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걸 선고받자 이전엔 없던 생의 의지와 삶에의 무한한 긍정을 갖게됩니다.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노인조차 마지막 불꽃같은 사랑을 하는 이유를 본인이 죽음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어서야 공감하게 된 것입니다. 


ⓒToni Demuro

법정은 폐정되었다. 법원에서 나와 차를 타러 가면서, 나는 매우 짧은 한순간 여름 저녁의 냄새와 빛을 느꼈다. (...) 이미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대기 속에서 들려오는 신문팔이들의 외치는 소리, 작은 공원 안의 마지막 새소리, 샌드위치 장수의 부르짖음, 시내 고지대의 급커브길에서 울리는 전차의 마찰음, 그리고 항구 위로 밤이 기울기 전 하늘에서 반향되는 어렴풋한 소리, 그러한 모든 것이 나에게는 소경이 더듬어가는 행로와도 같은 것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형무소로 들어오기 전에 내가 잘 알고 있던 그 행로를 말이다. 그렇다, 그것은 이미 오랜 옛날 내가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던 그런 시각이었다. (...) 그러나 이제는 무엇인가 달라져버린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일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이제 내가 다시 대면한 것은 바로 나의 감방이니까 말이다.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들이 죄 없는 수면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고 감옥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다는 듯이.   


"이제 곧 죽는다"는 사실은 내가 소중히 여겼었지만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들을 직시하게 합니다. 세상의 잣대와 타인의 시선이 향하던 그것들, 그래서 나도 가져보겠다고 악착같이 덤벼들었던 것들. 이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 모두 다 하찮은 것들이 되고 오히려 순간순간 내가 느꼈던 일상의 행복감, 이를테면 여름저녁의 냄새와 빛, 마지막 새소리, 시내 전차의 마찰음 등에서 삶의 가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수도승들의 "Memento Mori"는 "Carpe Diem" 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의 확신은 지금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인생에 충실하게 할테니 말입니다. '죽음의 확신이 삶의 가치를 높여준다.' 모순적이지만,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본다면 그렇게 갸우뚱할만한 명제는 아닐 것입니다. 


나는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나에게 가르쳐주었을 뿐이었다. 나는 죄인이고,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니, 그 이상 더 나에게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Sarolta Ban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웃어야 한다고 하는 일에 박수치며 웃음을 흘리고, 슬퍼야 한다고 하는 일에 눈물샘을 억지로 짜보는. 그러면서 오늘도 어딘가 속했다고, 이방인이 아니라고 자위하진 않았었나 돌이켜 봅니다. 

이미 사회라는 튼튼한 울타리에서 자란 우리가 사형을 정당화한다던가 죽음 앞에서 기쁨을 노래할 수는 없겠지만, 남들이 주입한 감정이 아닌, 스스로의 성찰 끝에 얻은 나의 솔직한 내면의 감정이었나를 늘 고민해보아야겠습니다. 이방인이 가져야 할 태도는 어딘가에 속하고자 나를 버리는 광대의 그것이 아닌, 모든 걸 낯설게 보는 여행자의 태도일 테니까요.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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