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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Feed-book!

은희경 아내의 상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6. 24.

은희경 작가는 오늘날 도시민의 성과 사랑, 그리고 성장의 문제를 일상적 차원에서 세밀하게 다루는 데 탁월한 작가입니다. 집단적 가치에 억눌려있던 개인적 삶의 이야기는 그녀를 통해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들로 다시 태어납니다. 일상적 인물의 사적인 일상사 속에서 현대인들의 소통의 문제를 예리하게 짚어내는 은희경의 소설은, 우리 개인의 내면 공간을 조금은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Sarolta Ban


<아내의 상자>는 이런 작가가 연출하는 사랑과 소통의 문제를 보이는 작품입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보통의 삶을 영위하는 남편과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그의 아내의 이야기입니다. 전형적인 소시민으로 도회적 삶의 관행에 깃들여진 남편과는 달리 아내에게는 때때로 강박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시사 잡지를 애독하고 증권 동향에 관심을 가지는, 규격화된 현대인인 남편과 다르게 그의 아내는 무엇인가가 결핍된,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불임'의 원인이 자신에게 믿고 있으며, 스스로 유전되어서는 안 되는 도태되어야 할 열성인자를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이 작품의 제목은 "불임파리"였다는 것을 보더라도 이야기의 초점은 아내의 불임 문제에 모아져 있습니다. 부부애가 중심이 되어야 할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에게는 2세가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 부부를 연결하는 끈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태아처럼 ‘다리를 가슴께로 끌어당긴 채 웅크리고 앉은 아내’의 잠든 모습은 이런 열망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듯 합니다.


ⓒElina Brotherus

 “나는 아내가 아이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질문을 나 자신에게조차 심각하게 해보지도 않았다. 나는 단지 인생은 필요한 것을 갖춰나가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불임 문제는 인물들의 일상을 파괴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아이를 가져야만 아내의 도리를 다한다고 강조하는 사회에서, 마치 아이를 갖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아내는 상식의 세계를 감당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가정의 모습’을 꾸리지 못하고 그 원인을 자신으로 보는, 아니 볼 수밖에 없는 아내는 잠으로의 끊임없이 도피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규격화를 강요하는 현대사회에 적응을 못한 채 껍질뿐인 육체를 영위하는 일종의 폐쇄적 자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아내의 자폐 증상은 표준화 된 현대인의 삶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며 항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Marcel Christ


남편이 속해 있는 세계를 규정하는 것은 신도시, 경제 뉴스, 회색 포장도로와 같이 '불'의 이미지를 가집니다. 아내를 둘러싼 일상의 균열은 실수로 가장된 화상이나 결혼사진의 화재로 암시되기도 합니다. 결국 그린파크라는 모텔의 붉고 선정적인 네온 불빛 아래 아내는 제물처럼 누워 있습니다. 불로 상징되는 남성의 제단 위에 받쳐진 희생양처럼 말이죠. 

 







ⓒMarcel Christ




반면에 아내는 물과 밀접한 이미지를 가집니다. 아내는 대학 입시 시험을 보던 중에도 물소리에 시달렸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 집에서는 모든 게 말라버려요!’라고 절규하기도 하죠. 도시의 아스팔트 길, 수분을 빼앗는 콘크리트 건물의 벽, 포푸리 화환 등도 이런 의미로 작용하는 듯 합니다. 남편으로 대표되는 불의 속성이 너무 강한 나머지 아내의 물의 이미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아내의 상자>는 희망도 출구도 없는 방에서 (말라버린 채) 살아가야 하는 우리 현대인의 슬픈 초상인 동시에, 비인간적으로 치닫는 현대사회에 대한 냉소와 경계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의 상자 속에 갇혀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Hugh Kretschmer


또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로 도금된 현대사회라는 폐쇄된 하나의 거대한 상자에 있는 현대인은 그 속에서 타의에 의해 사육되어지며, 마치 부속품이나 소모품과 같이 전락하게 됩니다. 출구가 없음으로 희망도, 자유도 꿈꿀 수 없는 일상은, 메커니즘에 수용할 수 없는 아내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죠. 남편의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이나 현대사회의 비인간적인 물질만능풍조로 인해 육체와 영혼이 겉돌게 된 아내가 결국 자신의 상자에 먼지가 쌓이도록 둔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려 하던 아내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의미하는, 즉 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무언의 표식인 것입니다.   

 남편에게 평온한 상황은 아내에게는 불온한 국면이 되고, 반대로 아내가 평온한 상황에서는 남편에게 불온한 국면이 조성되는 이 불행한 부부의 관계에서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지요-


“평온하다는 것은 수면을 내려다보는 사람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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