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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행복에 관한 질문들

악의 원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6. 12.

1964년 3월 13일 금요일, 뉴욕 주 퀸스 지역에서 키티라고 불리던 캐서린 제노비스라는 28살의 여성이 지배인으로 일하던 술집에서 야간당번을 마치고 귀가하던 새벽 3시쯤 한 수상한 남성에 의해 자상을 입는다. 제노비스는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구조 요청을 하였고, 아파트에 살던 동네 사람들은 불을 켜고 사건을 지켜보았다. 제노비스를 살해한 범인인 모즐리는 후에 법정 진술에서 집집마다 불이 켜졌지만 사람들이 사건 장소로 내려올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고 했다. 갑자기 불을 켜고 지켜보던 사람 중 한 명이 사건 장소로 오지 않는 대신 "그 여자를 내버려 두시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모즐리는 바로 도망을 쳤고, 제노비스는 난자당한 몸을 이끌고 어느 가게 앞으로 드러누웠다. 그러자 모즐리는 다시 나타나 제노비스의 온몸을 난자했다. 제노비스는 계속 소리를 질렀고, 또다시 아파트 불이 켜지자, 모즐리는 또 도망을 갔다. 제노비스는 힘겹게 자신의 집이 있는 아파트 건물 복도로 걸어갔다. 하지만 몇 분 후에 모즐리가 다시 나타나 제노비스를 강간했다. 이 살인사건은 새벽 3시 15분에서 50분까지 약 35분 동안 일어났다. 집에 불을 켜고 제노비스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총 38명이었고, 그들은 직접 사건 현장으로 내려가 제노비스를 구출하지 않았다.사건이 끝나고 한 명이 경찰에 신고했으나, 그녀의 목숨은 이미 끊겨 있었다.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D%82%A4%ED%8B%B0_%EC%A0%9C%EB%85%B8%EB%B9%84%EC%8A%A4_%EC%82%AC%EA%B1%B4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마치 괴담처럼 떠돌아다니기도 하는 일화이죠. '키티 제노비스 사건'이라 불리며 '키티 제노비스 신드롬'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했죠. 


 세상에는 악(惡)이 넘칩니다. 생명은 너무나도 연약하기에 이를 해를 미칠 수 있는 수 많은 악들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악이란 이전의 기독교적 기준처럼 사탄과 같은 존재에 의한 것, 신은 선하고 온전하며 악이 스며들 여지가 없으나 마귀라는 별개의 존재가 만들어낸 것일까요? 이전 서양의 철학에서는 온전한 선의 존재인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생각이 우세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수많은 악惡들은 어디서 생겨났냐는 질문을 하게 되지요. 선한 존재인 신에게서 왜 악이 나왔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 신은 여전히 선善한 것만을 만들었는데, 그러한 선의 부재不在가 악을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악이란 단지 선이 없는 상태라는 말이지요.


 윤리에 관해 역설한 칸트 또한 악에 대해 언급합니다. 보편적인 윤리, 정언명령을 강조했던 칸트는 악을 선한 이성의 명에 대한 거역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이성이 아닌 내 이기적인 욕심에 의한 결과이지요.
 동양에서는 성선설과 성악설, 인간은 처음부터 선한가 악한가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또한 노자의 도덕경에 따르면 인간 본래의 본성이 원하는대로 하면 사람들은 배가 고프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찾아가는데, 이러한 자연스러운 상태로 나아가는 힘을 거스르는 '고의적인 행위'를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서술하다보니 오해의 여지가 있을수도 있겠지만, 몇 가지 악에 대한 견해들을 다루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비추어지는 악의 모습은 어떤가요? 뉴스를 통해, 또 미디어나 드라마 등을 통해 보여지는 악은 어떤 절대적인 악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이 악한 역할만을 떠맡고, 그에 상대하는 주인공은 선善의 심판만을 자처하지요. 우리에게는 어쩌면 그러한 이분법이 편안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은 누구야? 다음에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누가 나쁜 사람인데?' 입니다. 특히나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한 애니메이션이나 프로그램들은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지요.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고 선이 악을 처벌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더 편안하게 느껴질 수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심판에 폭력이 수반되면서 정당화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서사들은 그런 경향에서 조금씩 벗어납니다. 다크나이트와 같은 영화들이 유명하지요. 현실에 눈을 돌려봐도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내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은,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없습니다. 단지 나와의 이해관계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다른 것을 조금 어기면서 나에게 잘해주는 친구에게는 조금 껄끄럽더라도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원칙을 지키며 나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섭섭하겠지요. 물론 배려심과 자기만족 사이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이 둘 중 어느쪽이 악이고 선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요.


 
 현대 사회심리학은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조명합니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수 많은 행위들이, 혹은 악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악의 표출이라거나 개별적으로 실존하는 악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의 결과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위의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시다.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있지만,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책임감의 분산'때문이라고 하죠. (방관자 효과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밖에서 떨어져서 보면 이해가 안될 수도 있는 사건이지만, 이 사건 안의 목격자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저녁 시간, 나는 아파트 안에 있습니다. 밖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내다보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나라면, 바로 112를 누르고 신고할 수 있을까요? 혹은 바로 달려나가 그 사람을 구하려고 할 수 있을까요?
 아파트 단지이고, 저녁시간이라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를 내다보고 있을 것입니다. 꼭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신고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나요? 또한 구하려고 나가려고 생각하다가도, 사람들은 모두 안나오고 있으니 별 문제는 아니지않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죠.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를 봐가며, 상황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참고하여 행동을 하게 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책임감 또한 분산해서 가지게 된다고 하지요. 

- 참고로 이전에 한 경찰과의 인터뷰를 봤는데, 사건이 있는 경우 여러번 중복되어도 좋으니 꼭 신고를 해달라고 합니다.

*

 인간에게 있어 가장 충격적인 악에 대한 예시는 바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같은 사람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살해할 수 있는지, 악 그 자체의 모습에 가장 잘 비유되는 예시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는 이에 대한 분석 중 큰 충격을 줍니다. 이는 아이히만이라는 나치 전범에 대해 다룹니다. 그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에 비해,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지요. 주변 이웃들로부터 성실하다는 평가를 듣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저지른 수 많은 악행들에 대해 자신은 '그저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아이히만의 모습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야기합니다. 악이라는 것이 오히려 평범한 모습으로, 성찰의 부재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사람이 경험이 많을 수록 성숙한다는 것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 역할에, 여러 입장에 서봐야만 서로가 원하는 것을 느껴보고 이해할 수 있지요. 그러한 것을 느껴봐야 알 수 있고, 성찰의 범위가 넓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지도자적 위치에 서서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이러한 주제에 대해 다룬 또 다른 작품이 유명한 베른 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der vorleser> 입니다.


줄거리
 삼십대의 여인 한나는 어느 날 아픈 소년을 도와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찾아가고,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한나를 위해 마이클은 글을 읽어줍니다. 하지만 한나는 어느날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마이클은 이때문에 평생 마음에 큰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고 마이클은 법대생의 신분으로 공부를 위해 법정에 가고, 그 법정에서 피고인석에 세워진 한나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한나는 사실 문맹이기 때문에 다른 일자리로 올라가지 못하고 나치에게 고용되었고, 유대인 수용인들을 감시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불이 났고 간수들이 열어주지 않는사이 대부분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한나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자리에 섭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4y24rJUuxNU
-동명의 영화에 대한 평론 링크

그녀는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간수로, 화재가 났을 때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그들이 대부분 숨지도록 내버려둡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한나는 "우리의 일은 그들을 감시하는 것이었고, 열어준다면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우리의 일은 그들을 감시하는 것이고, 그들을 놓아준다면 다 도망갈 것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 번은 반문합니다. 당신이라면 당신이 간수이고, 그곳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책임을 다할뿐, 그 이후의 성찰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입니다. 혹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경우에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람의 머리나 윤리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악행들은 이와같이 무지(無知)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도 그것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한에서는요. 그렇기 때문에 성찰은 중요하지만, 우리 또한 그러한 순응의 본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그저 커다란 변동을 일으키지 않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기업의 부패를 발견하게 되고 나는 그 중 일부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저항할 수 있습니까? 혼자서 그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저항하게 될까요 아니면 그 자리에서 묵묵히 일을 해나가게 될까요?


*
 또 다른 악의 원인 중 하나는 성격적인 부분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많은 반사회적 범죄자가 성격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에게는 위협과 처벌이 효과적인 억제수단이 아닙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또한 남용되고 있는 정신병질psychopathy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경우 일반적인 보상과 처벌에 크게 동요되지 않으며, 불안을 적게 경험합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예시를 들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우리의 모습에서도 이와같은 경향이 내재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말도 안되게 준비가 안된 상태로 여유롭게 버틴다거나 어떤 대비도 없는 행동은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거나 피해를 입힐 수 있지요. 이러한 때로는 악행 처럼 느껴지는 행동들이 사실은 어떤 불안의 부재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저도 이러한 불안의 부재가 빈번한 편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느껴져도 당사자는 어떤 불안을 적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또한 악이라고 생각되는 행동들의 원인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악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악이란 우리에게 미디어가 보여주려는 노력만큼 이분법적인 것이 아닌,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악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오히려 악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에 대한 통찰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내재해있는 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요소에 대해 늘 성찰하는 자세를, 다양한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시도를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관련 도서 및 참고도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캉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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