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데는 희망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늘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통해 불행한 한 인간이 어떻게 사랑을 통해 구원받고 행복해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모두 제목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간추려진 것도 많지만 두께가 만만치 않은데 비해 재미있게 읽히는 책입니다. 먼저, 저자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Достоевский)입니다. 그는 10년 동안 시베리아유형생활을 통해 신을 믿지 않는 사회주의자에서 신앙심 깊은 종교적 인간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인간 고뇌의 원천은 인간의 원죄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회 제도의 조건들과는 무관하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 그리고 그 내면에 숨어있는 죄악과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도덕적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 인간 구제의 길은 신에게 있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무신론으로 신을 부정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데 있다."
그리고 종교를 통한 구원을 중시하는 작품들을 써냈지요.
먼저 '죄와 벌'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한 대학생입니다. 가난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날부터 백해무익하다고 생각되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돈이 필요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아 세상에 해악을 미치는 전당포 노파는 한 마리 '이'와 같다는 이념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었지요. (또한 자신이 기존의 도덕에 안주하는 범인이 아닌 비범한 면이 있따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 음.. 그렇다! 인간의 힘으로 못할 일은 없는데, 그저 겁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지… 그런데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새로운 한 걸음, 새로운 자신의 말,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지…”
2. 하지만 마음 속으로만 가지고 있던 생각을, 몇 가지 우연에 의해 실제로 실행하게 되고, 전당포 노파 뿐 아니라 얼떨결에 집에 들어온 그 여동생까지 살해하게 됩니다.그 후에는 공포와 혐오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아, 나는 미친 것이 아닐까?’
그는 점점 공포에 사로잡혔다. 더욱이 이 뜻하지 않은 두 번째 범행 후에는 더했다. 그는 한시바삐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만약 그가 이 순간에 보다 정확히 생각할 수 있었다면 (…) 비단 자기의 공포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 자기의 행위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은 점점 더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단순한 판단력이나 기억력까지도 그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괴로워졌다. 어찌된 셈이냐! 벌써부터 벌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3. 특이한 점은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부정합니다. 그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과의 단절감,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데서 느껴지는 가책이었습니다.
나는 한 마리 이야… 둘 째, 한 달 동안을 두고 꼬박 전능하신 하느님을 증인으로 불러내어 이건 자기의 육신과 욕망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른 훌륭한 좋은 목적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실컷 응석부렸기 때문이다.
“만약 어머니가 아신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그때 모든 것을 고백해버렸어야 했던 것일까? 이건 내가 마음먹기에 달렸지.
그 사람은 나와 똑같은 사람이어야만 하지.”
4. 그리고 상황 또한 그를 옥죄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를 의심하는 예심판사와, 그의 비밀을 알아버린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를 협박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소냐(소피야 세묘노브나)의 회유와 포르피리의 설득을 받게 되고, 결국 자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하며 소냐와 함께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의 그로서는 무엇 하나 의식적으로 해결할 수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다만 느꼈을 뿐이었다. 그에게 변증대신에 생활(삶, zhizen)이 온 것이다.
*
줄거리는 이렇게 되지만 꼭 책을 읽어보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제가 자세한 많은 부분을 빼놓았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은 소냐의 신앙심에 의해 구원받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죄와 벌'은 단순히 불행 속에서 행복한 삶을 꿈꾸는 우리는 종교를 가져야 하거나 기독교적 신에게 의탁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일까요?
하지만 의아한 점은 작품을 읽어보다보면 정작 기독교적인 내용에 대한 서술은 자세히 나오지 않으며, 이 작품을 통해 배운 것은 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에서 인상깊게 다가오는 것은 차라리 소냐의 무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지요.
“고통을 받고, 그 고통으로 자신을 속죄하는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사람을 떠나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소냐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그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별안간 무엇인가가 그를 움켜쥐어 그녀의 발 밑에 몸을 던지게 했다. 그는 울면서 그녀의 무릎을 안았다. …그녀는 이해한 것이었다. 이미 그녀에겐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순간이 찾아 온 것이었다.
…아니, 지금의 그로서는 무엇 하나 의식적으로 해결할 수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다만 느꼈을 뿐이었다.
변증 대신에 생활(삶,Zhizen)이 온 것이었다. 의식 속에서도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가 형성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야, 그녀의 신명이 내 신념으로 되어도 좋지 않겠는가? 적어도 그녀의 감정, 그녀의 소망은 …….’
오히려 도덕이나 윤리는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한 것은 변증법이나 공리주의적인 계산이 아니라 다른 사람(타인)의 애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 윤리의 기준을 따라가다보면 혼자 사는데는 윤리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윤리는 결국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인 것이지요. 행복한 삶을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장해주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히려 동양의 철학과 관련이 있습니다. 서양의 많은 윤리와 철학이 기독교적 신을 기반으로 삼는 데 비해 동양의 윤리와 철학은 '신'이라는 존재를 따로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지요. 이를 동양의 관계론적인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 제기의 형태를 띠면서 동시에 서양 문명의 구조 자체의 모순과 불완전성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
-신윤복, 강의
또한 논어에서 말하는 인인(仁)과 같은 개념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형이상학적인 논리와 분석이라기 보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로 합니다.
논어의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상(愛人)이다.
子曰 道之以政하고 齊之以刑이면 民免而無恥라
: 법률로 백성을 지도하고 형벌로 벌주면
백성들은 법망을 빠져나가되 형벌을 피함을 수치로 여기지 아니한다.
道之以德하고 齊之以禮이면 有恥且格이니라.
: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서 질서를 유지시키면 백성들은
부정을 수치로 알고 착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고통스러운 삶에서 구원을 구하는 방법은 오히려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나를 파악하고, 인간 관계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필요로 합니다. 지식도 좋고 커다란 이상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데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도서 및 관련 도서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강의, 신윤복
-논어,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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