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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누가 사악한 늑대를 두려워하는가 / 카린 포숨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6. 9.

“나도 그걸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더라고요. 이웃 사람이 황소를 원하면, 하느님은 우리한테 암소를 보내준다나 어쩐다나.”


  처음 이 책을 만난 건 6년 전 학교 도서관이었습니다. 단순히 책의 제목이 멋있다고 생각해서 집어들었었는데, 지금까지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상위권에 머물러 있죠. 황소 대신 보내진 암소가 제 경우에는 아무래도 이 책이었던 모양입니다.

  첫 장부터 약간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나와서 처음 읽었을 때 깜짝 놀란 기억이 나네요. 이건 정신분열증 환자인 에르키의 내면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되는데, 지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이 소름끼치는 묘사를 나누고 싶어 전문을 실을까 고민을 잠깐 했습니다만, 그냥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짧게 적는 선에서 만족하겠습니다.



태양이 송곳처럼 그의 눈을 찔렀다. 그는 손을 눈 뒤로 들어 올렸지만 소용없었다. 빛이 연골과 뼈를 꿰뚫고 어두운 두개골 속까지 뻗어나갔다. 머릿속의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생각들이 조각조각 쪼개져서 사방으로 도망쳤다.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혹은 보여지는) 인물인 에르키는 정신병자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합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그 곳에 에르키가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경찰관인 구르빈마저 “그녀석을 법에 따라 영원히 없애버릴 수 있다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거야.”라고 말할 정도니 에르키의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가 어느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에르키가 정말 그렇게 무서운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에르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지나칠 정도로 냉혹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어 오히려 '정말 에르키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존재일까?'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들이 에르키를 병원에 집어넣었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경찰이 그 녀석을 찾아냈으면 좋겠습니다. 그 녀석이 벙인이었으면 좋겠어요.”

“왜요?”

브리겐은 팔짱을 꼈다. 하지만 배가 불룩헤서 제대로 껴지지 않았다.

“그럼 녀석을 영원히 가둬둘 수 있으니까요. 그 녀석은 위험하거든요. 만약 녀석이 물리적인 증거를 통해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할지도 모르죠. 그러면 이 동네가 조용해질 겁니다. 사실 그 녀석 말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배척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죠? 그것도 실질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말이에요. 특히나 그 대상이 ‘정상이 아닌’ 것으로 인식될 때, 자신과 ‘다를’ 때 이런 모습들이 더 극단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정상’이란 건 결국 뭐죠? 사람들의 말대로 에르키를 가두면 정말 동네가 조용해지는 걸까요?

글의 후반부로 갈 수록 점점 의심이 커지게 됩니다. 정말 에르키가 사람을 죽인 것일까? 이런 질문을 가지게 되는 건 독자 뿐만이 아닙니다. 글 속에 등장하는 세예르 경감과 에르키를 인질로 잡고 도망쳐 나온 은행강도 모르간도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정말 에르키는 미친 사람일까? 정말로 사람을 죽이고 다닐만한 인물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들이 이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세예르 경감은 에르키의 주치의와 사건의 정황을 파악해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모르간은 에르키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의외로 에르키는 아주 똑똑합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실은 너무 생각이 많아서 말로 표현하지를 못하는 것이었죠. 에르키가 한 말들만 모아도 굉장히 멋진 어록이 탄생합니다. 하나하나가 곱씹어볼수록 의미심장한 뜻을 가지고 있죠.


“시체를 떠나지 않는 파리는 결국 무덥에 같이 들어가게 돼.”

(...) 

“인간들은 자기가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해.”

에르키가 말했다.

“하지만 통제하지 못해. 그냥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버려.”


  에르키 말고도 이 책에서 중요한 인물이 한명 더 있는데요. 바로 열두 살 소년 카닉입니다. 카닉의 이야기는 이 소설 전체와 맞닿아있기 때문에 이 곳에서 소개하지는 못하겠네요. 나름대로 매력적이고 정말 독특한 인물입니다. 살짝 소름이 돋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게 되신다면 카닉에 집중해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에르키의 경우 몰입하기가 어려우니까요.

  에르키와 카닉 말고도 세예르 경감, 모르간, 스트루엘 박사 등 매력이 넘치는 다양한 인물들이 존재합니다. 특히 세예르 경감은 저자의 다른 범죄소설인 '돌아보지 마', '악마가 양초를 붙들고 있다'에서도 등장한답니다. 사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주인공 포지션을 생각한다면 이 책의 주인공은 에르키가 아니라 세예르 경감일텐데 말입니다. 이 책에서는 에르키의 존재가 너무 커서 다른 인물들이 살짝 가려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의 저자인 카린 포숨은 노르웨이에서 ‘범죄소설의 여왕’이라고 불려지는데, 독특하게도 원래는 시집으로 문단에 등단한 “시인”입니다. 시인이 쓴 범죄소설이라니, 신기하지 않나요? 

Karin Fossum

  시를 쓰시던 분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은 다른 범죄소설과는 다른 묘한 공기가 글의 곳곳에 자리잡고 있답니다. 위에 적어둔 에르키의 말들도 그 중 하나입니다. 또 각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도 정말 탁월합니다. 독특한 매력이 있어요. 읽으면서 나 자신이 그 인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요. 특히나 정신분열증 환자인 에르키의 내면을 서술할 때 그 진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카린 포숨은 ‘범인이 누구인가’가 아닌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내면에 숨어있던 공포와 두려움, 죄책감을 깊이 있게 그려내 독자들 또한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이 사건 속에 푹 빠져들도록 만듭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전 책의 배경이 노르웨이라서 그런지 책을 읽다가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카닉의 이름이 왜 ‘아이만큼이나 독특한 이름’인 건지, 카닉이 살고 있는 ‘구테바켄’은 정확히 어떤 곳인지 하는 것 말이죠. 소설 속의 풍경을 정확히 상상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제쳐두어도 충분히 이 소설은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늑대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숲에 가면 안 돼.”

에르키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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