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적 사고. 흔히 창의적이라고 인정받는 사람은 이것에 아주 능통하다죠- 쉽게 말해서, 비인격적인 것에 인격 부여하기 정도로 바꿔말해도 괜찮을까요?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과학자로 활동했었다던 작가 '아베 코보'는 이것에 아주 탁월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일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rin Case
<모래의 여자>역시 이러한 사고에서 시작합니다. 고체물질이지만 액체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희한한 광물. 모래. 작가는 '모래'라는 이 딱딱하고 아무맛 안나는 사물에 말랑하고 알싸한 무언가를 첨가하여 걸작 <모래의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소설 속의 모래는 ‘불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액체와 같은 끝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떠한 생물도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모래의 유동성은 주인공 남자가 동경하는 대상이 됩니다.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는 그에게 뭐라 말할 수 없는 충격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모래의 불모성은 흔히 말하듯 건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떤 생물도 일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 있는 것 같았다. … 그렇다면 정착은 과연 생존에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것인가. 정착을 부득불 고집하기 때문에 저 끔찍스런 경쟁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즉, 끝없이 흐르는 모래는 정착하지 못하는 동시에 끝없는 자유에의 갈구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고착화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주인공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되는 것이죠. 주인공 남자는 학교 교사인 평범한 도시인입니다.
ⓒHugh Kretschmer
소설에는 그의 개인적 생활사가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추상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조차 작품 속에서 ‘수색신청서’와 마지막 ‘실종신고 최고장’에 겨우 드러나 있을 뿐이죠. 그는 작품에서 그저 ‘남자’입니다. 하지만 교사로서 단조롭고 우울한 일, 인간적으로 서로 소통할 수 없는 회색의 동료들, 서로 상처만 주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아내, 기계적으로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의 무미건조함, 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피하고 싶은 욕망을 모래에 대한 동경을 통해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곤충채집이 취미인데, 신종 곤충을 찾고자 모래사구로 떠나고 거기서 황량한 모래구덩이속의 집에 갇혀사는 '모래의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하룻밤 지나고나니 유일한 연결통로였던 새끼줄사다리가 없어져 있었고, 그는 그녀와 함께 모래 구덩이 속에 갇혀버림을 알게 됩니다. 모래는 이제 동경과 욕망이 아닌, 극복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죠-
ⓒEmiliano Ponz
상처투성이 편도표를 손에 쥐고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왕복표를 거머쥘 수 있는 사람에 한한다.
하지만 그렇게 빠져나오려고 노력했던 모래구덩이에서 정작 탈출의 기회가 주어지자 남자와 '모래의 여자'는 결정을 보류합니다. 그들은 모래에서의 生의 발견을 한 것입니다. 이미 도시에서의 생활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목적없음을, 의미없음을 느낀 남자는 헛된 것을 갈구하며 도망생활을 계속하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아내와 새로운 사회를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장을 모래구덩이에서 구현하게 됩니다.
“물 데워지면, 몸 닦아드릴까요?”
불현듯, 새벽빛 슬픔이 북받친다....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영원히 핥고만 있는다면, 끝내는 혓바닥이 마모되어 버리지 않을까?
또한 남자는 그를 모래구덩이 속에 가두었던, 부당한 처벌을 가했던 타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나중에 사다리가 제공되었음을 통해)을 인정하고 그 역시 타인들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함으로서 더이상 모래를 탈출할, 즉 그들에 대항할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무척 임펙트있었던 소설의 첫문장이었는데요. 결국 소설의 모든것을 내포하고 있었던 한문장이었습니다. 모래의 여자와, 또 여자를 통한 타인과의 적대감해소는 그를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에서 나오게 했고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합니다.
남자가 모래에 남는 것이 결국 잠식되고 포기하는 인간의 나약한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래의 세계가 현실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통해 모래의 세계는 현대세계와 동일하게 읽힙니다. 남자가 모래사회에서 긍정을 찾는 것은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고뇌의 성취인 것이죠.
지금까지 부락은 일방적인 형 집행자였다. … 그는 어쩌다 거기에 걸려든 가엾은 희생자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 부락 쪽에서 보면, 오히려 버림받은 것은 자기들이란 얘기가 된다. 따라서 바깥 세상에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 따윈 없다.
ⓒJasper james
처음에 건조함과 유동성만이 모래의 본질이라 생각했던 남자는 모래 속의 감금생활을 통해 모래의 새로운 성질-흡수성을 띤 정착형의 모래-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생존본능적 행복추구를 위해 끊임없는 탈출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탈출은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그 실패 과정은 더욱 남자로 하여금 모래를 적극적으로 상대하게 만들고 이는 그의 자기존재감 형성의 초석이 됩니다. 이제 모래구덩이라는 비일상적 공간은 남자에게 벗어나고 싶은 감금의 공간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발견하고 창조할 수 있는 자기실현의 새로운 세계로 재해석됩니다. 남자는 왕복차표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세계와 창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힘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풍경이 없으면 그나마 풍경화라도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풍경화는 자연경관이 살벌한 지방에서 발달하고, 신문은 인간관계가 소원한 산업 지대에서 발달한다고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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