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esco Romoli
김애란 작가는 농담을 ‘바위에 묶인 풍선’이라고 했습니다.
풍선의 힘으로는 무거운 바위를 들수 없지만 풍선의 분위기가 바위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그래서 현실이 고달플수록 심각한 것을 꺼려하나 봅니다.
오늘은 풍선처럼 가벼운 그녀의 소설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겉표지부터 참 가볍습니다. 단순한 스케치와 형광의 빛깔들. 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날 시간 때우기 좋을 책일거라고 집은 이 책을 순식간에 읽었지만 책을 내려놓은 순간, 작가에게 속았음을 알게 되었죠.
이 책은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작가의 소설집입니다. 그 중에서 맨 처음 이야기가 <달려라, 아비>이구요.
영어로 하면ㅡRun, Devil, Run이 아닌ㅡRun, Daddy, Run 쯤이라고 해둘까요. 이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어머니와 자신을 두고 도망간 아버지를 둔, 사춘기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택시기사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어머니와 그녀의 어린 딸. 생각만 해도 얼마나 안쓰러운 소재인가요. 하지만 작가는 특유의 농담으로 이 신파적인 소재를 유쾌하게 풀어나갑니다.
어머니는 택시운전을 힘들어했다. 박봉, 여자 기사에 대한 불신, 취객의 희롱. 그래도 나는 어머니에게 곧잘 돈을 달라고 졸랐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새끼가 속도 깊고 예의까지 발라버리면 어머니가 더 쓸쓸해질 것만 같아서였다. 어머니 역시 미안함에 내게 돈을 더 준다거나 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아버지의 부재 역시 자신의 인생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아비없는 자식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쁠 것도 다를 것도 없는 일상이었죠. 아버지는 어딘가에 계시지만 그곳이 여기는 아닌것 뿐- 이라고 생각하는, 그렇게 애답지 않은 시니컬한 생각을 가졌지만 철들었다고 하기엔 천진한, 딱 그나이때의 사춘기 소녀이죠.
하지만 도망간 아버지는 사실 미국에 넘어 가있었고 거기서 세상에서 가장 시시하고 하찮은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담긴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면서, 소녀는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영어로 쓰인 그 편지를 꾸역꾸역 해석해내어 아버지가 얼마나 보잘것없이 살았음을 보게 되면서 엄마에게는 적혀 있지도 않은 “아버지가…… 미안하대. 평생 미안해하며 살았대. 그리고 엄마, 그때 참 예뻤대”라고 전하는 딸의 모습에서는 이미 딸이 아닌, 모성의 그것이 보입니다.
어딘가 한 평론집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의 엄마의 엄마가 될 때다’라는 구절을 본 기억이 납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인 어머니의 과거 시절로 돌아가 그것을 치유하고 보듬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아이는 비로소 어른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꼭 굵은 눈물줄기, 아니면 ‘괜찮냐’고 물어보는 연민의 눈빛과 함께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진실됩니다.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이미 엄마의 엄마가 된, 어른이 된 아이에게는 아버지의 존재도 다르게 해석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딘가에서 계속 달리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아이의 머릿 속에서의 아버지는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자신들에게 못 오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미안해서 못 오는 사람, 미안해서 자꾸 더 미안해해야 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 나중에는 정말 미안해진 나머지, 못난 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고 싶었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었을 거리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하고도 다른 사람이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진짜 나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이내 “나는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이며 그의 시시하고 초라한 인생에 연민을 느낍니다. 연민의 감정은 성숙한 마음입니다.
ⓒValentina Contreras
비록 그렇게 하찮게 살다간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또 아픈 것은 같이 아픈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죠.
얼마전에 아버지를 다룬 또 다른 이야기.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봤습니다. 김애란 작가가 보여주는 한국정서 특유의 골계미는 드러나지 않지만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참 좋은 일본 감독의 영화였습니다.
여기서도 남자 주인공이 어린 아들을 오롯이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동안 원망해왔던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되는 것이죠. 또 <달려라, 아비>에서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구요.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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