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아
어떤 작품을 보면, ‘글을 잘 쓴다는 건 말도 안 되게 끝내주는 기억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언젠가 작품으로 만들어야지' 하고 메모해 두는 것은 커녕, '이건 중요한 사건이다' 혹은 '되새겨볼만한, 같이 공유할만한 생각이다' 라는 판단조차 어려웠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인 듯 너무나 세밀하고 치밀하게 묘사하는 작가들의 글을 보면, 잊고 있었던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남과 동시에 비범한 타인(작가)의 글로밖에는 그 때를 상기할 수 없는 평범한 내가 보잘 것 없어보이는 것입니다.
타인과 접촉하면서 늘어가는 허세와 허위, 위선(이 모든게 순한 말로 하면 '사회화' 정도가 되겠죠) 이런 것들이 생겨나기 전, 오직 인간의 순수함만을 구애했던 <인간실격>을 읽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 불편한 무언가가 며칠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인간실격>은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주인공 ‘요조’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한 인생의 고뇌를 느꼈던 작가는 서른아홉살의 나이에 다섯 번의 자살시도로 생을 마감한 우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졸부라는 사실에 평생의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먹는 것 자는 것 걱정할 환경은 아니었지만 이 ‘부끄러움’은 오사무를, 그리고 그를 반영한 ‘요조’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 이라면서,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아이인 척 가장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요.
ⓒLora Zombie
그렇게 '웃는 원숭이'같은 어린 날을 보냈던 요조를 보면서 불편함을 느낀 건, 잊고 있던 제 어린시절이 생각나서였습니다. 10살즈음까지 전 재치있고, 인기많고, 사랑스러운 그리고 영리한 애였습니다. 남들에게 예쁨을 받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반대로 남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고 무난하게 살고싶어서인지 저는 어렸을 때 밝고 쾌할하고 또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아이로 비취고자 노력했었다는 게 <인간실격>을 읽으면서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세상과 사회질서에 융화되고자 하는 위선적인, 억지스러운 애씀의 시작으로 그려내는 작가를 보면서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어차피 들킬 게 뻔한데도 솔직하게 말하기가 무서워서 반드시 거기에 뭔가 꼬리를 다는 것이 저의 서글픈 버릇의 하나인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며 멸시하는 성격과 비슷하지만 저는 무슨 득이라도 보려고 그런 꼬리를 단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흥이 깨지면서 분위기가 일변하는 것이 질식할 만큼 끔찍해서, 나중에 저한테 불이익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의 ‘필사적인 서비스’, 그것이 비록 잘못되고 시원찮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서비스 정신에서 저도 모르게 한마디 덧붙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습성 또한 세상의 소위 ‘정직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어린 시절의 저는 그 위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만큼 영약하지는 못해서 더 괴로웠었습니다. 다정한 어머니가 어린 제 옆에 항상 계셨던 것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10살에 11살로 넘어갈 무렵의 며칠간 저는 어머니에게 거의 매일같이 고해성사의 편지를 썼었습니다. 목욕탕에서 어머니가 제 작은 몸뚱아리를 닦아 줄 때 조용히 고백했던 기억도 납니다. 우습게도 그 위선의 내용은 너무나 순수해서 오히려 더 안타깝습니다. 예를 들면 “친구랑 친구아빠랑 놀이공원에 놀러가서 핫도그를 먹었을 때 나에게 '왜 햄은 안 먹고 빵 부분만 먹냐'는 친구아빠의 질문에 나는 원래 소세지를 싫어한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뭐 이정도 수위의 내용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맛있는 부분을 아껴 먹으려고 빵반죽부분을 다 먹고 소세지를 먹었었거든요. 소세지를 아껴먹으려고 하는 내가 갑자기 초라해져서 한 거짓말이었는데, 그러한 작은 가면들도 순수한 민낯이었던 어린 저에게는 밤잠 설칠만한 부끄러움이었던 것이었나 봅니다.
ⓒToni Katai
자기파멸적인 요조의 모습은 이런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닮았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오직 순수함만을 갈망하던 여린 심성의 요조가 인간들의 위선과 잔인함에 의해 파멸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입니다. 그는 점점 더 에로스적 욕망보다는 타나토스적 욕망, 즉 파괴와 죽음을 욕망하는 인간이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어느 프랑스 여류작가가 그랬죠. 감히 타인을 미워할 권리는 없다고 여긴 요조는 차라리 자신을 미워하기로, 자신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이런 요조가 진정한 우정을 실감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는 남들에게 호감을 살 줄은 알았지만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는 큰 결함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죠.
그는 진정한 친구관계를 누구와도 맺지 못했지만 살면서 두 명의 여자를 만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 사랑을 느낀 여자는 쓰네코라고 하는, 긴자거리의 한 카페의 여급입니다. 취한의 키스를 거절당할 만큼 초라하고 궁색한 여자의 모습에 요조는 오히려 애틋함을 느낍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끝도 없이 술을 마셨고, 어질어질 취해서는 쓰네코와 마주 보며 서글픈 미소를 나눴습니다. 글쎄 듣고 보니 이건 묘하게 지쳐빠진 궁상맞은 여자로군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없는 사람끼리의 동질감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와서 쓰네코가 사랑스럽고 불쌍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때 적극적으로 미약하나마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인간은 역시 인간의 나약한 모습에 끌리는 것 같습니다. 본인의 불완전함을 이미 자각한 인간이 나처럼 불완전한 동류인간을 보았을 때 느끼는 결합에의 욕구. 이것이 사랑이 아닐까 조심스러운 추측을 해봤습니다.
하지만 요조는 쓰네코와 함께 결합의 의지를 가지기 보다는 동반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쓰네코는 죽고 요조는 살아남습니다.
그 후 폐인같은 삶을 살던 요조는 (잠깐 정부(情夫)같은 삶을 살기도 했지만) 담배가게에서 일하는 어린 처녀 요시코를 만나 처음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 마음이 정말로 요시코를 사랑해서 우러난 마음인지, 처녀의 상징이 가져다주는 숭고함과 자신에게 보내는 무한의 신뢰에서 오는 순수함에서 우러난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조는 정말 요시코와 결혼하게 됩니다.
“나도 어쩌면 차차 인간다운 것이 되어서 비참하게 죽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달콤한 생각이 희미하게 가슴속을 덥혀주기 시작할 즈음 아내가 이웃 남자에게 겁탈당하는 장면을 목격해버린 요조는 이내 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녀가 가진 ‘무구한 신뢰’만이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찾은 유일한 장점이었지만, 그 것이 죄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에 요조는 불안과 공포에 몸부림치죠.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도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저처럼 비루하게 쭈뼛쭈뼛 남의 안색만 살피고 남을 믿는 능력에 금이 가버린 자에게 요시코의 순결무구한 신뢰심은 그야말로 아오바 폭포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누런 오수로 변해 버렸습니다. 보세요. 요시코는 그날 밤부터 제 일비일소에조차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요조는 새치가 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아무런 희망도 없이 술과 마약에 찌들면서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늙어갑니다. 정신병원병동에 갇혔다가 시골로 요양생활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 자전적 소설의 끝에서 요조는 자신이 이제 ‘스물일곱’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Egon Schiele
그의 청춘은 남들의 그것과는 비교불가능할 만치 파멸적이고 절망적인 시간으로 지나갔습니다. 너무나 순수하고 연약해서 오히려 파괴되고 잔인해질 수밖에 없었던. 실제로 있을법한 한 인간의 일상의 기록이 너무나도 불편하게 읽히는 건 스스럼없이 드러낸 그의 치부가 우리가 표현하지 못한(어쩌면 알아채지도 못한) 나약한 내면의 밑바닥과 닮아서이겠지요-
그는 자신이 인간실격자라고 고백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다 인간 부적격자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보다 한 세대 쯤 먼저 태어났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동시대를 산, 전쟁의 파멸성과 잔혹함을 같이 경험한 작가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입니다. 오사무에게 데미안 같은 구원자같은 친구가 있었더라면, 제 어머니 같은 다정하고 충실한 청자가 있었더라면 그가 5번의 자살시도는 안하지, 아니 못하지 않았을까요.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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