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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아름다움과 뇌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1. 19.

이영도 작가의 판타지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에는 모든 종족에게 똑같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는 전설 속의 미녀, 나늬가 등장합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늬는 미모로써 다른 사람들을 홀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 존재라고 해요)

여튼, 이 '나늬'라는 존재는 제게 큰 질문 하나를 던져주었습니다: 과연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사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도 하고, 아직 우리는 뇌를 이해하는 기나긴 여정에 겨우 첫 걸음마를 시작한 정도니까요. 그래도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과정의 가장 기저에 있는 법칙 몇가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꽃은 인간이 아닌 꿀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도록 진화한 것입니다. (물론 꿀벌이 꽃을 보고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하지만 꿀벌들을 유혹하기 위한 꽃의 형태는 인간에게도 매혹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것은 꽤 흥미로운 이야기죠. 이것은 두 그룹이 독립적으로 같은 미학의 보편적인 원칙 중 일부를 수렴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는 수컷 공작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암컷 공작새가 아님에도 수컷 공작의 꼬리깃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만 수컷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자신들의 암컷들을 유혹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죠.


미학의 원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예로는 바우어새를 들 수 있어요. 수컷들은 짝을 유혹하기 위해 엄청나게 화려하게 장식된 바우어(Bower)를 만듭니다. 이 바우어는 집이 아니고 1회용 무대의 개념에 가깝습니다. 둥지는 따로 만든다고 해요.



사진에서 보이는 오렌지와 푸른 버섯, 창백한 푸른색인 나무껍질, 주황색 꽃 등은 모두 바우어새가 자신의 바우어를 장식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온갖 물건을 주워 와 주변에 장식하는 것이죠. 색깔별로 배치하는 것은 물론 장식품 하나하나 세심하게 각도와 위치를 고려하며 배치해요. 그냥 늘어놓는 게 아니랍니다. 심지어는 원근감을 이용한 착시 현상도 만들어내죠. 수컷 바우어새는 전반적으로 둥지의 외관과 구조의 세밀한 부분에도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만약 열매 하나를 둥지 앞에 떨어트려 놓는다면 새는 둥지를 원상복귀 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닐 것입니다. 많은 예술인들에게서 보이는 일종의 결벽증을 바우어새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나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바우어 장식이 각기 다른 종마다 다른 스타일을 보인다는 점이에요. 즉 수컷 새는 암컷들을 유혹하기 위해 독창적인 예술성을 보여준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도 꽃이나 수컷 공작새처럼 사람이 보기에도 꽤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즉, 인간과 다른 생물에게 공통적으로 아름답다고(혹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존재한다는 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에도 기초적인 원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실제로 개인의 주관적 판단과는 관계 없이 뇌로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 중 '뇌가 좋아하는' 몇가지 기준들이 있고, 이것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간단하게 두 가지 기준을 소개하려 해요.



첫 번째는 분류의 법칙입니다. 처음에 위의 그림을 보면 무작위의 얼룩점들만 보여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을 킁킁대는 달마시안 강아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뇌가 일부 얼룩점들을 그룹화해 '개'의 얼룩점들을 모두 붙였기 때문이에요. 뇌는 비슷한 것들을 그룹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성공적인 그룹화는 좋은 느낌을 주죠.

그룹화는 위장을 멀리하고, 복잡한 장면에서 물체를 감지하기 위해 진화하는 과정에서 발달해 온 것입니다. 이러한 그룹화는 '색상'이 있는 물체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덤불 뒤에 숨은 사자를 찾아내려는 수렵시대의 조상들을 한번 상상해보세요.눈에 보이는 것은 초록색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노란 얼룩 뿐입니다. 하지만 뇌는 이렇게 말하죠.

"얼룩들이 모두 같은 색인 것이 우연일까? 아냐. 이 얼룩들은 한 물체를 이루는 것일거야. 그러니 이걸 모아서 어떤 물체인지 한번 볼까? 이런, 사자네! 도망가자!"

어떻게 보면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 능력은 매우 유용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법칙으로 시각 뇌 중심에 통합되었습니다. 이는 조상들이 후세에 더 많은 자손들을 남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이는 진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죠.  

또한 '숨겨져(가려져)있는 것을 찾는' 행위는 감탄을 동반한 일종의 감정의 핵으로 작용해 거기에 더 관심을 주고, 무엇인지 확인하고 반응을 보이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과정이 더욱 세밀해지고 복잡해지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과정과 연결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정점변경의 효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뇌가 과도한 자극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와 관련이 있어요. 예술가들이 어떻게 정확히 사물의 본질을 추출해 그것을 그림이나 조각에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쥐를 이용한 가상실험을 한번 상상해볼게요. 쥐가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매번 쥐가 직사각형에 접근할 때마다 보상을 주고, 정사각형에 접근할 때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고 해 봅시다. 수십 번 실험을 하고 나면 쥐는 '직사각형=음식'이라는 등식을 배우게 되고 이후 정사각형은 무시한 채 직사각형을 향해 움직이게 되죠. 즉, 직사각형을 더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쥐에게 전에 보여준 직사각형보다 더 길고 더 좁은 직사각형을 보여주면 어떻게 될까요? 놀랍게도 쥐는 원해의 직사각형보다 새로 본 직사각형을 더 선호하게 됩니다.

왜 쥐는 훈련시킨 직사각형이 아닌 새로운 직사각형을 선택한 것일까요? 쥐가 멍청해서 그런 걸까요? 전혀 아닙니다. 이 쥐는 특정한 원형적인 직사각형(실험에서 사용한 '그' 직사각형)이 아니라 직사각형의 "법칙"을 배운 것이죠. 그래서 쥐의 입장에서 보면 더 직사각형일수록(긴 쪽의 비율이 짧은 쪽보다 클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길고 좁은 직사각형을 보여주면, 그 쥐는 '우와! 완전 직사각형이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러한 효과를 "정점변경"이라고 해요.

그렇다면 정점변경과 예술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가장 쉬운 예로는 '캐리커쳐'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캐리커쳐는 대상이 되는 인물의 특징적인 부분을 보다 크게 확대해서 그리지만 결과물은 실제 인물보다 더 실제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메커니즘은 너무나도 복잡합니다. 오늘 이야기한 내용은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 수준에 불과하죠. 아마 이 과정을 이해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상호작용이 아주 간단한 원리 하나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점이,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진화를 거듭해온 결과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 놀랍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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