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심리학적 원리와 실험결과들이 증명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과 인식이 매우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미 정해져있는 (물리적으로 자명한) 얼굴을 기억하고 인식하는 과정조차도 우리는 기억과 경험에 의해 주관됩니다. 어떤 사람을 (처음) 봤는데 그 사람이 이전에 알던 누군가와 너무 닮아서 새로운 사람으로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이전에 알던 누군가와 계속해서 오버랩되는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 사람에게 새롭게 익숙해질수록 이전에 알던 사람과의 연쇄는 느슨해지고, 그 사람을 이전보다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듯 확실한 사항들도 변동하게 되는데, 주관적인 느낌은 어떨까요? 입으로 말하기도 아플정도이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강조하게 되는 것은 결국 이 모든 것이 외부 자극에 대한 '나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외부자극이 우리의 생물학적인 매커니즘을 강력하게 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때로는 아주 약할 뿐이라도 이를 주관할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피로사회
또한 현대 사회에는 이전과 같은 죽음에의 공포와 생존에의 몸부림이 줄어든 반면, 우울이라는 내 안의 적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하루 하루 내 안의 적과 싸워나가야 하지요. 높은 자살률과 자살을 막기 위한 국가의 노력을 보자면, 이는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피로한 사회'에서 인기를 얻은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바로 한병철의 <피로 사회>이지요.
이 책은 아주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이해하자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 시대의 정신적 질병의 근원은 '면역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외부의 질병으로 부터 감염되듯이 나와 타자의 구분이 확실하며, 이질적인 대상이 제거되는 양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변증법적) 사회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규정지어주는 규범사회이며, 이질성은 폭력의 대상이 됩니다. '다른' 사람은 광인으로 배척받죠..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세계화 과정이 일어나며, 냉전이 종식되며 현대 사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은 이러한 이질성의 소멸입니다. 나-타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모두가 곧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우리는 이전의 부정성보다는 '긍정성의 과잉'을 겪게 되지요. '모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린 '성과사회'입니다. 사실 이러한 성과사회라는 시스템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폭력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를 모른채 살아갑니다. 이전의 의무보다는, 성과를 위한 압박이 우리를 지배하고, 이는 우리를 스스로 착취하도록, 피로하도록 만드는 힘이며 우울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28)
"성과 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29)
그리고 이러한 '과잉'적인 사회에 대한 해법으로는 '깊은 심심함'을 내놓습니다. 이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과 같은 버드런트 러셀의 저작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심함과 깊은 사색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창조할 힘을 줍니다. 이 피로사회에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무위의 상태, 영감을 주는 피로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 못하며 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 다른 활동을 해볼 것이다. 하지만 심심한 것을 좀더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어쩌면 걷는 것 자체가 심심함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움직임을 고안하도록 몰아갈 것이다. 달리기, 또는 뜀박질은 새로운 움직임의 방식이라기 보다 그저 걷기의 속도를 높인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다. 오직 인간만이 춤을 출 수 있다."(33)
"한트케는 이런 말 못하는, 보지 못하는, 분열시키는 피로에 대한 대립자로서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세운다.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의 피로는 자아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틈새를 열어준다
(...) 근본적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위에 관한 것이다. " (68-69)
비판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모두가 이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장정일의 독서노트 (시사 인)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5308
피로사회에서 말한 성과 주체, 스스로를 경영하는 성과주체의 자기착취에 대한 대안으로서 무위와 안식은 개인적인 처방에만 그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러한 시선은 외부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도록 하며 이에 대항할 연대나 타인에 대한 인식 등을 와해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자기 착취란 성공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에서 오는 몫이기보다, 구조의 산물이다. 내가 자주 들르는 구립 도서관 화장실 출입구에는 환경미화원의 사진과 이름이 적나라하게 공개된, 시간별 임무 일정표가 붙어 있다.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구립 도서관 화장실 청소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몰상식한 ‘신상 털기’와 임무 일정표는 환경미화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효율을 높이려는 고용주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지, 성과 주체의 자기 착취 열정에서 나온 착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병철은 그들을 가리켜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라고 부른다. "
(출처 및 전문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5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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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쪽에 동의하시나요?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스스로는 양 측 모두 새로운 생각할 거리를 가르쳐주었다는 점에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제 상황에서 제 주변의 경우를 생각해보게 되는데, 성과 자체가 높아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쟁으로 인해 이전보다 높은 성과에의 압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에의 기준이 높아지고, 어려서부터 사회로부터 습관화된 경쟁에 의해 내면화된 압박감, 강박감을 가지게 되고, 스스로가 절대적인 기준에서 나쁘지 않은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도 스스로를 낙오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압박은 습관화 과정에서 외부 시스템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으며, 또한 이가 내재화되면서 또한 스스로를 착취하는 주체가 되었다고도 생각합니다. 이러한 압박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많은 것에 눈을 돌리게 하고, 짧은 순간에 새로운 것을 해내는, 넓고 얕은 상태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몰입의 즐거움을 생각했을때, 이러한 다리 걸치기식의 짧은 성취감은 결국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열쇠가 될 수 있지요. 현대인에게 습관처럼 붙어버린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우울증을 유발시킨다는 최근의 연구결과 또한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대응은 이에 대한 인식에서 부터 시작되며, 이를 인식하고 고쳐나가고자, 이러한 경쟁과 압박의 내재화, 습관화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노력이 여러 개인에게서 시작되어 조금씩 바뀌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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