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떻게 사는가, 왜 사는가의 문제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책 중 하나가 <이방인>으로 유명한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입니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1913-1960)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한 삶에 대한 있을 수 있는 대책으로서 '자살' '희망' '반항' 세 가지를 예시하면서, 그중 마지막의 것을 참된 해결책으로 꼽는다. 앞서 부조리는 합리성을 열망하는 인간의 의식과 비합리성으로 가득 찬 세계 사이의 대립에서 발생한다고 말한 바 있다.
자살이 해결책이 못 되는 것은 부조리의 한쪽 항인 '인간의 의식'을 삭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희망, 즉 종교가 해결책이 못되는 것은 부조리의 다른 쪽 항인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삭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항상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는 다른 피안의 세계를 상정한다.) 따라서 자살과 종교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회피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장 존귀한 진실은 의식의 끊임없는 유지라는 것인데, 반항이란 바로 세계의 모순을 살아 있는 의식으로 바라보며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카뮈가 시지프를 '부조리의 신'으로 만든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행복한 시지프 (알베르 카뮈, 2004.1.15, ㈜살림출판사)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46992&cid=269&categoryId=1091
먼저 까뮈는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문제를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왜 살아야하는가의 문제로 두는 데서 시작합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 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그보다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이 질문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질문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실천으로 이어지는지 묻습니다. 과학적 주장을 위해 삶을 버리는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반면에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죽음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진 경우는 수 없이 많습니다. 까뮈는 자살을 '굳이 살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데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세 가지 요소가 일치할 때 자살을 감행한다: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결여, 주변 사람에 대한 부채감, 폭력에 대한 내성, 세 가지 조건 중 한가지만 충족되지 않아도 자살까지는 가지 않는다고 한다. " -김형경, <남자를 위하여> 중에서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죽지 않고 살아갑니다. 까뮈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중 첫째 가는 이유가 습관이다.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습관의 가소로운 면, 살아야 할 심각한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 없는 성격, 그리고 고통의 무용성을 본능적으로나마 인정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하지만 그는 절대 자살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자살은 삶의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도 아니고 그저 삶의 부조리를 끝까지 상대하지 않고 도피해 버리는 행위일 뿐입니다. 이러한 논리적인 설명 외에도 자살은 주변에 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이 되기도 하지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는 우리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 서론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부조리와 자살 사이의 관계를 밝히고 자살이 어느 만큼이나 부조리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려는 데 있다."
"인생은 살 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그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진리다. 삶에 대한 이런 모욕, 삶을 수렁에 빠뜨리는 이런 부정은 과연 삶의 무의미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모든 군더더기를 치워버리고서 밝히고 추적하고 해명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과연 부조리는 죽음을 명하는 것인가."
여기서 세상의 부조리란 의식을 가지고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인간과, 그러한 가치가 보장해주지 못하는 세상 사이의 갈등을 말합니다. 세상은 어떠한 의식 속에서 만들어지거나 인간에게 삶의 가치를 부여해 주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지요. 그러한 침묵하는 세상에 떨어져 자신이 왜 사는가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은 영원한 이방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 "그렇다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수면마저 이루지 못하게 하는 이 측량할 길 없는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설사 시원찮은 이유들을 가지고서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낯익은 세계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돌연 환상과 빛을 잃은 세계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이방인이 되었음을 느낀다. 이 낯선 세계로의 유적에는 구원이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도 약속된 땅의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그 삶, 배우와 무대장치 사이의 절연,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
이렇듯 침묵하는 세계 속에서 까뮈는 '부조리의 추론'을 이야기합니다. 어떠한 비약이나 곧 깨어질 덧없는 희망, 혹은 내세나 종교와 같이 허황된 도피처를 찾지 않고 냉철하게 끝까지 이러한 부조리를 응시하고 나아가는 것, 이를 부조리에의 추론이라고 합니다.
여러 작품들을 통해 부조리의 추론, 창조, 인간의 태도에 관해 다룬 뒤 까뮈는 마지막으로 <시지프의 신화>를 꺼냅니다.
시지프는 시시포스라고도 불리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입니다. 신을 농락한 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첫 번째는 시지프가 아조프의 딸 아이기나가 제우스에게 납치당했을 때, 코린트 성에 물을 대주는 조건으로 제우스가 숨은 곳을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자신을 잡으러 온 사신을 쇠사슬로 묶어 세상에 죽음을 없애버린 사건입니다. 이에 분노한 하데스(저승의 신)는 전쟁의 신 아레스를 보내 사신을 풀고 시지프를 잡아오지요. 하지만 시지프는 아내에게 자신이 죽거든 시체로 장례를 치르지 말고 던져두라 이릅니다. 그리고 하데스 앞에 당도한 시지프는 자신의 장례도 치르지 않는 괘씸한 아내를 벌주고 오도록 놓아달라 사정합니다. 이에 하데스는 그를 놓아주고, 또한 시지프는 세상을 즐기며 다시 돌아오지 않죠. 그러자 머큐리를 보내 다시 시지프를 잡아옵니다.
시지프는 이렇게 신을 농간한 댓가로 신들에게로부터 아주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아주 무거운 바위를 산 꼭대기로 밀어올리는 형벌을 말이죠. 하지만 바위는 꼭대기에 도달하는 순간, 아래로 다시 굴러 떨어져내립니다. 그러면 시지프는 다시 내려가 바위를 밀어올려야 하죠. 시지프는 이러한 허무하고 반복적인 고통을 존재하는 동안 영원히 겪어야하는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까뮈는 시지프가 이를 인식하고 있음에 초점을 맞춥니다. 또한 이러한 시지프의 삶이 인간의 삶과 닮아있음을 포착하죠. 우리는 어차피 죽을 것을 압니다. 또한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스스로 부여해주지 않을 것을, 헛된 희망은 깨어져버릴 것을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까뮈는 그러한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이를 향해 끊임없이 반항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행복이란 그러한 인식과 함께 공존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며, 이러한 형벌에서 고통을 느끼기보단 행복을 느끼려는 시도라고요.
"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며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 있어서만 비극적이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 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 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된다. "
아래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민음사)의 옮긴이의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권위적인 기성 사회의 무게에 눌리기도 하고, 때로는 주위 사람들의 질시와 미움의 무게에 눌리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커다란 감정의 무게에 눌리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수레바퀴 아래 깔린 달팽이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레를 끌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운명을 짊어진 수레바퀴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고향의 짙은 흙내음을 맡으며, 다른 바퀴와 함께 어우러져, 달그락거리는 가락에 맞춰, 공동의 이상향을 향하여, 흥겹게 돌아가는 수레바퀴 말이다. 그 수레 위에 꿈과 사랑과 역사를 싣고서." -수레바퀴 아래서, 김이섭 옮긴이의 말 중에서 (민음사)
*참고 도서 및 관련 문헌
<시지프 신화> 알베르 까뮈,책세상
<남자를 위하여> 김형경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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