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겨울은 전년에 비해 많이는 춥지 않은 것 같습니다. 2월 들어서는 초봄처럼 따뜻한 날들도 꽤 있었던 것 같아요. 지구온난화 때문이라는 우울한 이야기도 있지만, 추위에는 쥐약인 저로서는 적당히 찬 겨울이라 좋았습니다.
올 겨울 가장 흥행한 아이콘은 단연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었지요. 귀여운 등장인물, 흥미로운 내용만큼이나 신나는 삽입곡들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주인공 엘사와 동생 안나를 주제로 한 팬 아트, 패러디 동영상들도 쏟아져 나왔고요. 4D로 본 친구는 엘사가 얼음을 쏴 댈 때마다 실제로 차가운 바람이 나와서 덜덜 떨면서 관람했다는 리얼한 후기를 남겨줬습니다.
추위를 무척 많이 타는 저는 겨울에는 외출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평소 산책하고 걷기를 좋아해서 혼자 두세 시간쯤은 목적 없이 잘 걸어 다니지만 겨울만큼은 찬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금방 귀가하곤 합니다. <겨울왕국>에서 바람이 쌩쌩 불고 눈보라가 치는 하얀 스크린을 보면서 심각하게 걱정했습니다. '안나 진짜 춥겠다.'
그래서 오늘 소개할 책은 잭 런던의 <모닥불>(To build a Fire)입니다. 이 책이 기억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예요. 제가 읽었던 어떤 책보다 더 추위를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책을 읽고 나서 제가 추워지는 느낌까지 받았어요.
내용은 간단히 이렇습니다. 알래스카의 몹시 추운 겨울날, 금광을 찾는 주인공이 홀로 길을 떠납니다. 동반자는 없고, 개 한 마리만을 데리고 떠나는 여정이지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저녁쯤에는 따뜻한 모닥불이 있는 캠프에 도착해 동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보다 훨씬 낮은 온도, 알래스카에 혼자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시작한 여정에서 결국 그는 추위의 공격에 조금씩 지치게 되고, 결국 황량한 얼음 벌판에서 홀로 서서히 죽게 됩니다.
잭 런던은 자연주의 경향의 미국 소설가입니다. 자연주의는 사실주의(Realism)을 극단으로 몰고 간 모양새로 개인의 운명은 자유 의지가 아니라 유전과 환경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인물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발전시킵니다.
위험한 바깥 날씨를 감지하고 인간을 따라오기를 주춤대는 개는 이 소설에서 '본능'을 상징합니다. 대립되는 인간은 '오만한 이성'이지요. 개는 본능적으로 위험과 한계를 깨닫지만, 인간은 자신만의 아집에 사로잡혀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무모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배경이 되는 알래스카의 평균 기온은 영하 50도. 특별히 추웠던 배경이 되는 날의 온도는 영하 70도입니다. 극단의 환경과 상황 아래에서 보여주는 하잘 것 없는 인간의 오만과 근거 부족의 자신감, 거기서 오는 비극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특기할 만한 어떤 사항도 묘사되지 않습니다. (소설에서 잔인할 정도로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되는 것은 엄청난 추위, 그것 하나뿐입니다.) 이것은 주인공을 인류 전체의 대표로, 일반적인 인간의 속성을 대표해서 표현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중반에 개가 깨진 얼음 사이에 빠지게 되는데요, 이를 녹이기 위해 불을 피우려다가 추위에 노출된 주인공의 손과 발마저 전부 얼어버리게 됩니다. 성냥을 집을 수 없을 정도로 얼어버린 몸에, 정신 역시 온전하지 못했던 그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불을 피우게 됩니다. 간신히 불을 붙이고 안도하기도 잠깐, 나뭇가지 위에 얹혀있던 눈이 온기에 녹으면서 그대로 불 위로 쏟아져 모닥불을 전부 꺼트려 버립니다. 온몸을 바쳐 피운 불을 잃은 그는 개를 죽여서 그 안에 손을 넣으면 따뜻하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합니다.
사실 저는 이 장면과 맞닥뜨렸을 때, 끔찍하거나 징그럽다는 생각보다 그렇게 해서라도 따뜻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다시 불을 피우고 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건 좋은 생각일 수도 있겠다는 본능적인 다급함과 절박함이 앞서 들었습니다. 사실 현대인들에게는 영하 70도의 얼음땅에 혼자 남겨지는 것과 맞먹는 익스트림한 환경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극단의 상황,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이성과 제도, 절차와 형식보다는 본능이라는 폭군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잔인하도록 생생하게 간접체험하게 하는 것이 이 작품의 놀라운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반전이나 기적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절망적인 추위 속에서 한 인간이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엔 죽게 된다는, 어쩌면 너무나 우울한 이야기이지요. <겨울왕국>에서처럼 사랑으로도 녹일 수도 없는, 막막할 정도의 얼음 속에서 죽어가는 이 소설 속 이야기는 디즈니와는 다른 리얼 월드 속 이야기에 더 차갑게 느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본능이나 이성 같은 복잡한 이야기는 접어 두고라도 얼어붙는 추위를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는 소설이 있을까 하는 순수한 감상에서 잭 런던의 <모닥불>은 <겨울왕국> 4D버전보다도 강렬한 경험일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그 냉기가 당신에게도 전해질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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