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아픈 소식들로 넘쳐납니다.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없고 씻을 수 없는 상처인데, 너무 쉽게 다루어지고 잊혀집니다. 타인의 고통은 미디어에 의해 다루어졌다가 대중들에게 잊혀질 뿐, 그 자체는 영원히 피해자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곤 합니다.
아무런 일이 보도되지 않는 하루라 하여도, 누군가에게는 지독하게 아프고, 누군가는 아픈 이들을 지켜보며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수전 손택Susan Sontag(1933~2004)은 미국에서 태어난 비평가입니다. 다수의 문학작품을 펴냈으며,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과 같은 에세이를 펴낸 반해석주의자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 <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를 펴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에서 말하는 바는 명료하며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인간의 본성
수전 손택은 먼저 인간의 본성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흥분을 느끼며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고통을 관람하는 것과 성적인 쾌감 사이에는 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해서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
다음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히에로니무스 보스, 1450년경 ~ 1516)의 작품들입니다. <세속적 쾌락의 동산, 1505~1510년경>에는 에덴동산, 천국과 지옥이 묘사됩니다. 그 중에서도 지옥의 묘사는 잔인함과 고통이 매우 자극적으로 묘사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작품을 볼 때 느끼는 것이 단순히 "아 지옥에 가면 아프겠구나 나쁘게 살지 말아야지!" 일까요?
<지옥 부분, 확대>
"이러한 '예술작품'들은 교훈적인 의미를 전달한다는 명목하에 '병적일 만큼 음란한 정신 상태'의 시각적 등가물이 될 뿐이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와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일종의 '포르노그라피'가 되어 버리고, 이러한 이미지를 보는 행위가 (의도를 했던 하지 않았던) 일종의 관음증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날이면 날마다 끊임없이 폭력의 이미지가 쏟아져 나오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 이미지의 성격 자체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스르고, 소란을 줄러 일으켜야 하며,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쪽으로'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또한 인간의 '친비극적인' 면모에 대해 읽어볼 수 있습니다. 책의 주된 내용이 이에 관해 서술하지는 않지만, 아폴론적인 정형적이고 아름다운 질서에 반하는 디오니소스적 파괴. 죽음을 수반하는 인간의 생에서는 필연적으로 몰락에의 비극적 도취의 체험이야말로 생의 체험이라고 하죠.)
인간에게 (타인의 고통을 수반하는) 잔인함을 즐기며 보려는 측면이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잔인하고 자극적인 기사의 제목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실제로 클릭하거나 보려는 사람의 수도 늘어납니다. 정말 타인의 고통이 스스로에게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그러한 고통을 관람하고자하는 욕망보다 크다면 그런 자극적인 기사일 수록 인기가 없겠죠. 또한 그러한 '고통'을 굳이 가상으로 양산까지 해내는 시리즈물이나 게임들이 인기를 끌지도 않을 것입니다. 단지 '자극적'이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고 하기엔 그러한 이미지들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우리를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드라마나 예술작품은 단지 실제 타인의 고통이 아닌 '가상'의 고통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의 미디어가 실제 누군가의 뼈저린 고통을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가상화 시켜버릴 것이 우려됩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WHAAM!(1963) :
명랑한 이미지로 전쟁을 표현하여 끔찍한 참상이 어떻게 이미지화를 통해 왜곡되게 다루어지는 지를 느끼게 해준다>
현대의 특성
" 이렇듯 이미지 자체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갈수록 자극적인 요소들을 요구하게 되면 이미지들은 타인의 고통을 재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타인의 고통은 '소비를 자극하는 주된 요소이자 가치의 원천'이 된다. 바야흐로 오늘날의 문화에서는 이미지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셈이다. "
게다가 현대사회는 사람들의 관심이 곧 돈, 자본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그것이 진실을 담고 있지 않더라도, 심지어 거짓으로 인해 분노를 사더라도 단순히 시선과 관심을 끄는 것으로 금전적 이익이 보장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단순한 관심이 자본이 되는지는 다양한 현상에 기인합니다. 그러한 관심의 지면을 통한 광고를 통한 것일 수도 있고, 단순한 노출에 의한 그 자체의 광고효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앵커가 정치에 출마하여 인기를 얻고 쇼핑몰을 운영하는 사람이 특이한 기인으로 나오는 텔레비전 프로도 그러한 현상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관심을 요하는' 사회가 타인의 고통 또한 스펙타클로 소비하다못해 더 자극적으로, 더 끔찍하게 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신문이라는 상대적으로 전문적인 매체를 통해서 보도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기사'를 보도할 수 있는 계층은 넓어졌고, 통제가 약화되어 검열에서 자유로운 보도가 가능해진 장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말' 또한 지나치게 많아졌습니다.
특히 SNS는 이러한 현상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극적인 내용의 글이나 사진이 실립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요. 그리고 그 페이지의 끝에는 조그맣게 광고가 붙어있습니다. 관심과 흥미를 끌어 이익을 보기 위해서 피해자에게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음에도 갖가지 루머나 글, 사진등을 지어내어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SNS에 접속해보면 이미 진실여부와 같은 것은 무의미해진 기분이 들지요. 미디어를 통해 전해듣는 소식이 우리 믿음의 전부가 되어버리고 있는 가운데, 선정적인 보도로 인한 모방범죄나 고통에 대한 무감각은 무시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터넷에 달리는 댓글과 관심은 또한 연민의 성격을 가집니다. 나는 이만큼 연민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과시라는 차원을 넘어, 우리 안에 있는 연민의 잣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니체는 우리가 가지는 '도덕'이라고 하는 것들이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에게 비극이 일어나길 바랄만큼' 이루어지지 않는지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얼마나 당당한가요?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방식은 이와 같아서는 안됩니다. 타인의 고통은 소비의 대상이 아닙니다. 물론 고통을 보도하는 것이 누군가의 행복을 (불행에서의 극복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에 구호를 요청하는 보도들이나 어려운 이웃들에게 모금을 실천하도록 하는 보도들은 그러한 선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범죄에 대한 여론의 감시와 분노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의 형식을 빌어낸 폭로는 재수사와 같은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묻혀질 뻔한 끔찍한 범죄를 폭로한 소설, 영화 도가니>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왜 사람들이 분노하면 집행되고 분노하지 않으면 집행되지 않는 것입니까? 이러한 공분이 사그라들면 왜 다시 문제는 덮어지는 것입니까? 이러한 이유로도 보도와 폭로는, 대중을 설득하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단순히 타인의 고통을 보도하지 말고, 묻어두자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공정한 보도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날 유난히 심해진 누군가의 고통을 소비하는 행위에 대해, 그것을 통해 피해자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단순히 자기 위안적인, 혹은 이를 수단삼아 이익을 보려는 행동은 없어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도서 및 관련 도서
-인용("")은 대부분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입니다 (일부만 다루었기 때문에 다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려요)
-히에로니무스 보스(화가) : http://ko.wikipedia.org/wiki/%ED%9E%88%EC%97%90%EB%A1%9C%EB%8B%88%EB%AC%B4%EC%8A%A4_%EB%B3%B4%EC%8A%A4
-비극의 탄생, 니체
-도덕의 계보, 니체
-도가니, 공지영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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