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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행복에 관한 질문들

언어, 생각을 담는 그릇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5. 28.

 우리는 오늘 하루도 수 많은 말들을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글로, 생각으로 우리의 '언어 생활'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에 대해 잠깐 생각해본다면 재미있는 발견을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단어를 반복해서 계속 생각하거나, 되뇌어 봅시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이라는 말을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예를들면예를들면.....

 반복할 수록, 이 '예-를-들-면(혹은 ㅇ-ㅖ-ㄹ-ㅡ-ㄹ-ㄷ-ㅡ-ㄹ-ㅁ-ㅕ-ㄴ)' 이라는 글자들이 분리된 글자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그 전체의 의미와의 연관성이 약간씩 와해됩니다. 이를 한동안 세간에서는 게슈탈트 붕괴(Gestalt Collapse Phenomenon)라고 불렀는데요. 이러한 현상이 진짜 학계에서 인정받은 것인지 그저 만들어진 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일상적으로는 우리가 겪지 않는 현상이지요. (실제로 쓰일 때에는 대상의 일부에 집중하다가 전체적인 맥락적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어지는 것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게슈탈트 원리가 어떤 부분들이 모여서 부분 자체에는 가지고 있지 못한 의미를 전체적으로는 가지게 되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비추어보아,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슈탈트 원리 Gestalt Principle

유사성 similarity, 근접성 proximity, 연속성 continuity, 폐쇄성 closure 등의 원리로 부분들의 합을 바라볼 때 적용되는 원리.
유사성: 비슷한 것들끼리 관련된 것으로 묶는다.
근접성: 가까이 있는 것들끼리 한 가지 대상으로 본다.
연속성: 부드럽게 연속되는 경향으로 본다
폐쇄성: 틈이 벌어져있더라도 폐쇄된 형태가 우세하다면 폐쇄된 도형으로 인식

(그림 출처_ 추가 설명: http://allpsych.com/psychology101/perception.html )

  우리가 그 단어에서 의미를 생각해내는 것은 'ㅇ,ㄹ,ㅖ'와 같은 개별의 단어의 구성 요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이라는 언어의 맥락이 우리에게 해석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쉬르, <일반 언어학 강의>

"언어는 화언실행을 통해 동일한 공동체에 속하는 화자들 속에 저장된 보물이며, 각 뇌리 속에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모든 개인의 뇌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문법 체계이다. 왜냐하면 언어란 그 어느 개인 속에서도 완전할 수가 없고, 집단 속에서만 완전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의 내용을 이해하기에 훨씬 쉬울 것입니다. 이 책은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가장 유명한 내용을 다루겠습니다.

"언어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한 사물과 한 명칭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청각영상이다. 이 청각영상이란 순전히 물리적 사물인 실체적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의 정신적 흔적, 즉 감각이 우리에게 증언해주는 소리의 재현이다. 따라서 청각영상은 감각적이며, 우리가 '실체적'이라고 규정한다 할지라도 이는 바로 위와 같은 의미에서이고, 또한 연합의 다른 한 요소, 즉 일반적으로 보다 추상적인 개념에 대립하여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 "
개념 :청각영상: [나무]


"이제 서로 대립되면서도 서로 전제하는 용어들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서 문제되는 세 개념들을 지칭한다면 모호성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전체를 지칭하는 데 기호(signe)라는 낱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개념청각영상에는 각각 기의(signifie)기표(signifiant)를 대체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

 위의 내용은 아주 유명하게 알려진 기표(청각영상, signifiant 시니피앙)과 기의(개념, signifie 시니피에)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합은 자의적임을 보여주지요.

" 제 1원칙 : 기호의 자의성
  기표를 기의에 결합시키는 관계는 자의적이다. 또는 좀 더 간략히 언어기호는 자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바, 그 이유는 우리가 기호를 기표와 기의의 연합에서 비롯되는 전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가령 'soeur(여자 형제)'라는 개념은 그것의 기표 구실을 하는 s- ö-r라는 일련의 소리들과는 아무런 내적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그 개념은 다른 어떤 소리에 의해서도 똑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증거로 언어들 사이의 차이점과 서로 다른 언어들의 존재 그 자체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나무를 [나무]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tree] 라고 부릅니다. 프랑스어는 [arbor]이라고 합니다. 어떤 말이 더 '나무'를 잘 표현한 소리인가요? 이런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나무를 어떻게 부를지는 그 사회에서의 자의적인 약속이지, 나무 자체가 어떤 소리에 메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또한 언어는 사회적입니다.
" 언어기호가 자의적이라 했으므로, 이렇게 정의된 언어는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고, 합리적 원칙에만 의존하는 자유로운 체계로 보인다. 언어의 사회성은, 그 자체만 볼 때, 이 관점에 정확하게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집단적 심리는 순전히 논리적인 소재를 취급하지는 않는다. 개인 대 개인의 실천적 관계에서 이성을 약화시키는 모든 요소를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언어를 당사자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수정할 수 있는 단순한 규약으로 간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사실은 사회적 힘의 작용과 결합하는 시간의 작용이다. 지속을 전제하지 않는 한, 언어 현실은 완전한 것이 될 수 없고, 어떠한 결론을 불가능하다. "
 혼자만 사용하는 언어가 있다면, 이는 아무리 좋게봐도 반쪽짜리 언어밖에 되지 못하겠지요.

우리가 사용하는 말

 어느 때보다 빠른 요즈음의 사회는 새로운 언어가 생겨나는 속도 또한 LTE급입니다. 처음에 교과서나 뉴스에서 요즘 사람들이 '방가방가'나 '하이루'를 쓴다는 말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하며 놀라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하지만 미묘한 사람들의 상태를 기발하게 표현해낸 표현들이 급속하게 늘어났지요.
멘붕 (멘탈 붕괴) / 쩐다 / 드립 / 병맛 등등과 같은 말을 이전에 있던 어떤 말들로 적당히 대체할 수 있을까요?
이전에는 저러한 말을 쓸 상황에 어떤 말을 했었을까요? 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고는 언어를 이용하고, 언어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는 표현들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가지고 있겠지요.

 이러한 신조어적 표현은 인간관계에도 침투해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썸'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는데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말 많이 쓰이는 표현입니다. (변형: 썸타다 / 썸남 / 썸녀)서로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아직 사귀지는 않는 사람들의 관계에 많이 쓰이는 말이지요. 이전에 그런 표현이 없던 시절에 선배들이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 때를 뭐라고 해야될 지 모르겠는데, 사귀기 전에 서로 아슬아슬하게 설렐 때가 제일 좋았었어" 지금같으면, '썸타던' 때가 좋았어. 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궁색한 타령일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말들이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에 있어 그 미묘함과 설렘, (자신의 일이므로) 특별하게 여기고 싶은 마음이 그저 보편적인 표현으로 (사용하기엔 참 편하지만) 불리어진다는 것이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누군가를 소개받아서 그저 서로 만나보고 있는 것도, 혹은 누군가를 정말로 짝사랑하며 그리워하지만 상대방의 태도가 불분명할때도 같은 표현으로 불린다는 것은 아쉽습니다. 
 이전에 나이가 지긋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그 때 사귄다, 사귄지 며칠 되었다. 이런 표현도 쓰지 않았어.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만난다고 했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만나는 특별한 경험이 점점 더 커다란 사회적인 메뉴얼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된 현상이 어떤 언어적 표현들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연애를 해라, 라는 조언과 고민 상담은 넘치고 있습니다. '술 권하는 사회' 대신에 '연애 권하는 사회'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연애를 안하는 사람을 못하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모쏠: 모태 솔로, 태어나서 연애를 한 번도 안해본 사람'과 같은 말로 연애를 '하는 것'자체를 어떤 의무처럼 부과하는 느낌까지 든달까요. 연애를 하는 것은 좋고, 이에 대한 고민은 항상 있어왔고, 그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넘쳐나는 말들이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좀 더 아껴주고 사랑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흥미 본위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즈음의 표현들로 표현하기에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2000)>같은 영화는 어떨까요? 격한 애정표현도, 어떤 강력한 고백도 없지만 흐르는 '사랑의 분위기'를 말이죠.(영어 제목이 in The mood for love입니다)




*참고 도서 및 관련 영화
-일반 언어학 강의, 페르디낭 드 소쉬르 (민음사)
-<화양연화>(2000), 왕가위 감독, 장만옥,양조위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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